별이 된 작은 소녀가 남긴 메시지

최경

Visit417 Date2015.11.26 15:55

ⓒ호호

〈SBS스페셜〉, 〈그것이 알고 싶다〉등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26년 동안 TV 다큐멘터리작가로 활동해 오신 최경 작가가 그 26년의 이야기를 ‘내 손안에 서울’에서 들려주십니다. 작가로 26년을 지내오는 동안, 알게 된 사람들의 사연과 세상을 보는 시선을 감성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으시다는 최경 작가의 글은 매주 목요일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나씩 들어보실까요?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1)

사무실에 툭하면 전화를 걸어오는 소녀가 있었다. 마치 당연히 해야 할 일상인 것처럼 소녀는 전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이야기하며 통화를 원하곤 했다. 늘 코앞에 닥친 다음 방송 때문에 바빴던 우리는 되도록 간단하게 소녀와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끊곤 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소녀의 전화공세에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 소녀는 우리에게 소중한 출연자였다.

사실 소녀를 알게 된 건,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환아와 가족들의 지속적인 솔루션을 생각하며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였다. 당위와 열망만 있었을 뿐 허허벌판처럼 아무 것도 없었던 그때, 나는 후배와 함께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 하나만 챙겨들고 지방의 도시로 향했었다. 몇 명의 환아와 그 가족들을 직접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환우회로부터 추천을 받아 한 집을 찾아갔을 때, 꼬마 여자아이가 뒤뚱거리면서 달려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줬었다.

14살, 중학생이었지만 키가 몹시 작았고, 생김새도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뮤코다당증이라는 희귀질환을 갖고 태어난 소녀는 병 때문에 눈도 잘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갈라지는 목소리도 거친 피부도 독특한 외모도 모두, 앓고 있는 희귀질환 때문에 나타나는 특성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잠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방으로 사라졌던 소녀가 중학생 교복으로 갈아입고 배시시 웃으며 다시 나타났다. 자신이 중학생이라는 걸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카메라 레코드 버튼을 누르고 바로 앞에 앉아있는 소녀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 때, 어딘가 불편한 듯 다리를 벌리고 엉거주춤 앉아있는 소녀에게서 이상한 것이 보였다. 그것은 배꼽을 뚫고 공처럼 부풀어있는 혹이었다. 병 때문에 장기가 배꼽 쪽으로 밀려 나와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공처럼 부푼 혹을 쓰다듬으며 괜찮냐고 물었고,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답했다. 말을 그렇게 했어도 소녀는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희귀질환을 안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14살이 되도록 늘 합병증에 시달려야 했고, 외모 때문에 학교에서, 동네에서 온갖 불편한 시선들을 견뎌야 했다. 더군다나 딸의 장애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아빠까지도 소녀를 멀리하고 있었다. 그날 이 소녀를 만나면서 우리가 기획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이 무엇으로 향해가야 하는지가 분명해졌다.

그리고 소녀는 두 달 뒤, 새로 시작한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다각도로 솔루션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동안 멀기만 했던 학교 친구들, 그리고 아빠와의 관계가 기적처럼 개선되기 시작했다. 소녀가 습관처럼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작가언니와 피디아저씨, 조연출 오빠의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묻고 통화를 하게 된 것도, 1년에 한 두 번씩 초콜릿과 사탕 선물을 한보따리씩 보내는 것도 방송에 출연한 뒤 부터였다.

그렇게 1년쯤 흘렀을 때, 다시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온 이는 소녀가 아니라 엄마였다. 바로 1시간 전, 소녀가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병원 정기검진을 오는 길에 갑자기 숨이 가빠져 힘겨워하더니 그 길로 의식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날 소녀를 알고 있는 제작진 모두가 만사를 제쳐두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소녀를 싸매고 있던 너무나도 작은 하얀 시트를 보는 순간 모두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그렇게… 소녀는 15년을 살다가 별이 됐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내가 여전히 그 키 작은 소녀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아이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인간은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아픈 아이나, 건강한 아이나, 모두 똑같은 ‘인간’이잖아요.”

따가운 시선과 편견을 작은 몸으로 오롯이 받아내면서 소녀가 했던 그 말.

가슴을 무겁게 울리던 그 말은 쉽지만 결코 쉽게 지켜내기 힘든 말, 그래서 늘 숙제로 남는 말이다. 밤하늘에 별이 유난히도 빛나는 날이면, 문득문득 소녀가 생각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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