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로운' 조계사가 선택한 떡집

이장희

발행일 2015.11.11. 07:30

수정일 2015.11.11. 11:42

조회 1,388

서울의 오래된 것들 (6) 낙원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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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동에는 1960년대까지 낙원시장이 있었다. 지금은 낙원상가 지하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가는 형국인 이 재래시장은 과거에는 궁궐을 비롯해 고관대작이 많이 살던 북촌과 가까워 다른 시장에 비해 물가도 높았고 품질도 좋은 물건들이 많이 거래되던 곳이었다고 한다. 시장에 떡집이 들어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였을 텐데 낙원시장이, 특히 전국에서도 떡으로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때는 경술국치로 조선 왕조가 무너지면서 시작된다. 궁궐을 나온 많은 상궁과 나인들이 호구지책으로 이 근처에 터를 잡고 궁중 떡을 빚어 팔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궁중 떡을 맛보려던 많은 서민들이 몰려들었고, 떡집은 무척 호황을 누렸던 것 같다.

이때 낙원떡집의 창업자라 할 수 있는 김사순 여사는 본래 타고난 손맛을 갖고 있었는데, 상궁들 거처를 오가며 떡 빚는 일을 거들면서 그 비법을 익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919년 즈음 본인의 가게를 시작한 것이 낙원떡집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손맛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 중에도 떡을 빚어 팔 정도로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후 딸 김인동 씨를 거쳐 다시 손녀딸 이광순 씨까지 3대째 떡 맛은 변함없이 이어졌고, 지금은 증손자인 김승모 씨가 4대째로 가업을 내려받을 준비로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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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낙원떡집의 맛은 널리 퍼져갔다. 초대 대통령 때부터 청와대에서 주문하는 대부분의 떡을 공급했는가 하면, 까다롭기로 소문난 조계사의 떡도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정·재계 인사를 비롯해 원로 연예인들까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많은 이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오랫동안 떡을 팔다보니 실수도 없지 않았다. 언젠가 칠순 잔치에 돌잔치 떡을 보내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인 칠순 노인은 앞으로 더 많이 살라는 뜻으로 그냥 받겠다며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백일떡을 해갔던 집의 아이가 커서 혼인떡의 주인공이 되어 찾아오는 것을 보며 일의 보람을 느끼기도 했단다. 한평생 고객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 오래된 가게의 멋이 아닐까! 5년 후 가게의 백년을 맞는 날에 백순 잔치의 떡을 맞추러 오는 누군가도 기대해 보고 싶어진다.

난 가게를 나서며 가장 인기가 많다는 떡 몇 개를 사들었다. 그리고 근처 탑골공원에 앉아 가만히 떡을 음미했다. 마침 허기가 느껴지던 차에 맛보는 떡 맛, 진정 꿀맛이었다. 그래,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그늘 아래, 바로 여기가 낙원이구나!

출처_서울사랑 vol.144(2014_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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