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09.25. 13:20

수정일 2015.11.16. 05:42

조회 1,552

아이들ⓒ뉴시스

학창 시절에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다.
--버트런드 러셀 《런던통신 1931-1935》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93

갓 개교한 여자중학교의 2기 졸업생이었던 내게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것만큼 무겁고도 어이없는 말이 다시없었다. 무논이 펼쳐졌던 자리를 메워 개발한 택지 지구에 덩그러니 들어선 학교의 풍경은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우리는 체육시간마다 운동장이랍시고 다져놓은 벌판에서 캐도 캐도 자꾸 솟아나는 돌멩이를 주웠다. 그늘을 드리울 만한 변변한 나무도 없어서 고스란히 땡볕 아래서 붉은 먼지를 들이켰다. 그런 지경에 ‘전통’이라니, 그건 다름이 아니라 비평준화 지역이기에 서열화 된 고등학교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한다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명분은 그럴 듯했다. 좋은 성적을 거두어 ‘신흥 명문’으로 부상한다는 게 나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빛나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끔찍한 과정이었다. 한마디로 내 중학교 때의 기억은 오로지 끊임없는 체벌, 가혹한 신체적 징벌로 가득 차 있다. 1학년이나 2학년 때도 아주 평화로운 상태는 아니었지만 3학년에 올라가 받은 체벌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할 정도다. 교사들은 자신의 몸과 외부의 기물 전체를 도구로 사용했다. 뺨을 맞고 귀를 잡히고 머리채를 꺼둘릴 때도 있었지만, 성적과 관련된 체벌에는 주로 밀대 걸레 봉, 빗자루 봉, 회초리, 지휘봉 등이 사용되었다. 단체기합도 빈번했다. 그러니 아무리 나 혼자 성적이 좋대도 소용없었다. 어느 모의고사가 끝난 뒤에는 운동장 뒤편에서 3학년 전체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기도 했다. 1시간을 꼬박 그렇게 앉아 있다 일어났을 때 다리에서 느껴지던 기괴한 이물감은 지금도 몸을 저릿하게 한다. 내 곁에서 친구들이 벌목된 나무처럼 쿵, 쿵 쓰러졌다.

열세 살에서 열다섯 살, 미묘하고도 중대한 삶의 변화를 겪고 있던 여자아이들에겐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환경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꿋꿋이 맷집을 키우며 견뎠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미화를 해서도 그 시절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없게 되었고, 어른과 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불신하다 못해 경멸하고 염오하며 자랐다. 심지어 큰비가 내려 학교 주변의 길이 모두 잠겼을 때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하나하나 업어 큰길까지 데려다 준 미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내 그들을 사랑으로 기억할 수 없었다. 자식의 학교 ‘뺏지’에 따라 면이 서고 구겨지는 부모들 또한 침묵의 동조자였다.

물론 지금은 안다. 모든 인간이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으니, 교사들도 그 야만의 시대에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하지만 여전히 매를 맞아야만 아이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착하고 예의바르게 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때 해소하지 못한 분노로 괴롭다. 러셀의 말대로 그 무지와 포악함이야말로 체벌이 피해자에게 남긴 가장 큰 멍 자국, 노예의 낙인이기에.

#김별아 #빛나는말 #가만한생각 #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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