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면 사라지는 노량진 육교를 위한 송가

시민기자 박장식

발행일 2015.09.16. 17:01

수정일 2015.09.16. 17:17

조회 2,639

노량진육교의 야경. 밝은 도시와 홀로 어둑히 서있는 육교가 대비된다

노량진 육교의 야경. 밝은 도시와 홀로 어둑히 서있는 육교가 대비된다

땅거미가 땅을 뒤덮을 무렵의 저녁. 그 땅거미가 가장 먼저 내려앉는 어둑어둑한 육교 위에는 사람들이 각자의 길을 향해 떠나고 있다. 이른 아침 엄마 밥을 대신할 고시식당 밥을 먹으려고, 점심 무렵 오랜만에 노량진에 온 친구를 맞으러 가려고, 이른 저녁 백팩을 메고 학원을 향해 털레털레 걸어가는 사람들도 모두 거쳐 가는 곳. 서울에서 가장 의미 있는 육교요, 어쩌면 10월 이후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 될 노량진 육교의 이야기이다.

노량진 육교는 1980년 서울특별시 동작구가 분구되면서 생겨난 뜻 깊은 육교이다. 당시 종로와 을지로 등 주요 도심의 지가가 올라가고 정부의 개발 정책, 인구포화 해소 정책으로 인해 종로학원, 대성학원 등의 유명 학원이 서울 외곽 노량진에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곳의 심장을 가로지르던 노량진 육교는 자연스레 수험생들의 상징이 되었다.

노량진역에서 바라본 노량진 학원가

노량진역에서 바라본 노량진 학원가

이후 20세기가 끝나갈 무렵이 되자 수험생을 대상으로 하던 노량진 학원가는 인근의 목동, 강남 등 신흥 부촌에 자리 잡기 시작한 학원들로 인해 수능 성적을 올리려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점점 줄기 시작했다. 교복 입던 학생들이 찾던 곳에서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모인 고시촌으로 노량진의 의미가 뒤집어지기 시작한 것은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취업난이 거세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찬밥 취급받던 공무원과 법조인 등의 안정적인 직업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이들을 상대로 한 학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노량진을 오가는 누구라도 이곳 ‘노량진 육교’는 들러야 한다. 역이 있는 수산시장방향 육교와 노량진 방향 육교는 서로의 풍경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쪽은 학원 광고판과 노점이 가득한 북적이는 거리, 한 쪽은 정돈된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고시생들은 이 육교를 “속세로의 다리”라고도 부른다.

노량진역 건너편의 건물들도 특이하기는 마찬가지다. 고시식당 밥에 지치고, 문화생활이 없어 지친 고시생들이 피를 뽑고, 그 대가로 패스트푸드점 세트 쿠폰과 영화쿠폰을 얻어가는 ‘헌혈의 집’과 피곤한 육체에 카페인을 공급해 줄 ‘커피 프랜차이즈 전문점’이 이웃 건물에 입주해 있다. 밥 종류를 비롯해 여러 음식을 일회용 그릇에 담아 파는 길거리 노점상이 있는가하면, 길 건너편에는 번듯한 식당 가게들도 공존하고 있다. 그야말로 모든 곳이 부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라 할 만 하다.

점심때가 되면 육교 아래 유명한 고시식당 앞에 역시 책을 옆구리에 끼운 사람들이 줄을 선다. 노점상 앞에는 노량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이, 싼 물가를 체험하러 놀러온 사람들이 모여 컵밥을 먹는다. 노량진의 골목 어귀에 붙은 조그만 음식점에서 밥을 먹던 고시생 한모씨는 “저기(노점상)서 밥 먹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아서, 오히려 밥집 안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추리닝(?) 복장에 고시책을 팔 사이에 낀 두 사람이 자칫 어깨가 부딪칠 만큼 좁은 길을 오가다보면 단 하나의 인사말조차 들을 수 없던 노량진에서 이들이 살아 숨 쉬는 인간임을 체험할 수 있다. 특히 노량진 육교가 그랬다. 이곳에서는 조금이라도 힘을 주어 걸으면 강하게 울리는 떨림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조금 큰 차가 빠르게 지나가도, 심지어는 지하철이 노량진역을 느릿느릿 빠져나가도 롤러코스터마냥 출렁였다.

결국 안전문제가 주원인이 되어 노량진 육교는 올해 10월을 기해 철거될 예정이며 횡단보도로 대체된다. 지하철 1호선 출구의 역할은 환승통로가 개통된 후의 9호선 출구로 대체된다. 세월의 때에 묻어가는 콘크리트 다리에게 35년은 긴 세월이다. 어쩌면 국내의 육교와 고가도로가 세워진 지 20여년이 지나지 않아 안전과 미관을 이유로 철거되는 것을 보면 ‘요절’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셈이다.

노량진역 육교를 대체하게 될 노량진역 환승통로

노량진역 육교를 대체하게 될 노량진역 환승통로

고시생 윤모씨는 “노량진이라는 도시는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큰 강과 큰 산을 끼고 있는 배수진이라는 인상 정도를 심어 주는데… 사실 육지 속의 섬 같다”라고 말한다. 마음대로 공부를 접고 나올 수도 없고, 그대로 갇혀있기에는 허송세월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섬에 갇혔다가 육지로 나올 때 많은 각오를 다져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노량진 육교는 단순한 도보 시설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 이 때문에 철거하고 횡단보도로 바뀌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고운 시선만 보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월이 변함에 따라 한강의 갯벌 포구에서, 국내 최초 기차의 시발점이라는 역사의 터널을 지나, 고시생들의 애환이 담긴 학원 도시로 지금처럼 계속 변모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노량진육교에서 바라본 야경

노량진 육교에서 바라본 야경

노량진 육교의 철거가 그곳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육교 이상의 의미를 자랑했던 노량진 육교를 기억하는 누군가는 육교의 자리에 세워진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이곳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때는 참 힘들었던 시간이었다고. 하지만 그 육교 너머로 바라보던 서울의 야경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말이다.

#노량진 #육교 #노량진육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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