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투혼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재근(문화평론가)

발행일 2015.09.15. 11:25

수정일 2015.11.16. 06:17

조회 435

아이돌그룹 `여자친구`가 공연 모습ⓒ뉴시스

아이돌그룹 `여자친구` 공연 모습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컬처 톡’ 114

여자친구라는 우리 걸그룹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최근 강원도에서 열린 라디오 공개방송 무대에서 이들이 한 공연 때문이다. 당시 비가 내려 무대가 미끄러운 상황에서 평소처럼 춤을 추며 노래했기 때문에 이들은 연달아 넘어졌다. 그러고도 곧바로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발랄한 무대를 이어가는 모습에 폭발적인 찬사가 쏟아진 것이다.

미국의 타임 매거진이 공식 트위터에 “여기 8번 넘어진 K팝 가수가 당신이 하는 일에 꾸준히 전진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것”이라며 영상을 소개했다. 그 외에도 영국의 데일리 미러, 데일리 메일, 호주 야후, 뉴질랜드 뉴스 TV1을 비롯해 이스라엘, 네덜란드, 멕시코,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매체들이 이 영상을 소개했다. 한국 가수의 영상이 이렇게 전 세계 외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싸이 이후 처음이다. 국내에서도 여자친구의 팬이 됐다는 사람들이 잇따라 나타났고, 이미 활동기간이 끝났던 여자친구의 노래가 다시 인기차트에 오르는 차트 역주행 현상도 나타났다.

이렇게 넘어지면서도 최선을 다해 공연에 임하는 이른바 ‘꽈당투혼’에 사람들은 감동 받는 법이다. 과거에도 카라의 한승연이 꽈당투혼으로 큰 인기를 끌었었다. 한승연은 한족 팔에 깁스를 한 상태에서 무대에 오른 부상투혼으로 팬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런 꽈당투혼과 부상투혼에서 사람들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열정’을 본다.

하지만 그런 투혼이 만성화된 사회가 과연 정상적인 사회일까? 사람이 자꾸 넘어지면 공연을 즉시 중단시켰어야 했다. 무대를 정리하고 안전이 확보된 다음 공연자를 올리는 것은 기본중에 기본이다. 여자친구의 꽈당투혼은 바로 그런 기본 중의 기본이 안 지켜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이 기본이 지켜지는 정상국가였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사태인 것이다.

한국은 비정상의 시기, 즉 비상시기를 겪었다. 한국전쟁 폐허에서 속도전식 압축성장을 이뤄냈던 시기다. 그때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경제를 건설해야 했기 때문에 안전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던 시절이고, 안전이나 과정의 꼼꼼함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했던 시절이다. 그런 비상 질주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지만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과로사했다. 이런 현대사는 우리 사회에 안전불감증이란 후유증을 남겼다. 요즘도 툭하면 터지는 후진국형 안전사고들은 모두 이런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됐다.

사람 한 명 한 명의 안전을 세세히 챙기는 것보다 행사진행이라는 결과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이 넘어질 만한 환경에서도 공연이 시작되고,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넘어져도 공연을 중단시키지 않는 것이다. 과거 한류드림콘서트 때는 비로 인해 미끄러워진 무대에서 에이핑크가 넘어졌고, AOA의 초아는 행사 무대에서 얼굴이 바닥에 부딪힐 정도로 넘어졌다. 그래도 공연은 중단되지 않았고, 걸그룹 멤버들은 벌떡 일어나 안무를 이어나갔다. 꽈당투혼이 만성화된 사회인 것이다.

부상투혼도 이런 분위기의 산물이다.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도 응급조치만 받은 후 경기에 투입된다든지, 몸이 아픈 사람이 진통제를 먹고 출근한다든지, 무리한 촬영으로 쓰러진 배우가 주사 한 대 맞고 촬영장에 복귀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과거 무쇠팔이라고 불렸던 최동원 선수는 한국시리즈에서 무려 4승을 거두기도 했다. 단 다섯 경기 만에 이룩한 성과인데, 여기에 1패까지 있었다. 4승 1패, 즉 다섯 경기 모두 다 등판했다는 이야기다. 팀승리 앞에 사람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선진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식의 투혼 역투 때문에 한국 투수들의 어깨 수명이 미국보다 짧다고 한다.

이제는 그런 투혼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결과, 속도지상주의에서 사람 한 명 한 명의 안전을 세세히 챙기는 안전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이 자꾸 넘어지면 그 어떤 공연이라도 즉시 중단시킬 수 있는 안전우선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경제성장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안전이 최우선인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선진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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