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 잠시 서늘한 꿈을 꾸어본다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07.17. 09:27

수정일 2015.11.16. 05:44

조회 441

눈ⓒ재빈짱

‘사람은 참 허약한 존재예요. 머리부터 뼈까지 완전히 와싹 뭉개져 있었대요. 곰은 훨씬 더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도 몸에 전혀 상처가 나지 않는다던데’하고 오늘 아침 고마코가 했던 말을 시마무라는 떠올렸다. 암벽에서 또 조난 사고가 있었다는 그 산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을 진 산을 바라보노라니, 감상적이 되어 시마무라는 사람의 살결이 그리워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3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지글지글 끓는 한여름의 한낮에 길을 걷다가, 뜬금없게도 이 구절이 떠올랐다. 밤새 지붕에 높다랗게 쌓였던 눈이 툭, 떨어지는 느낌이다. 많은 독자들이 가장 인상 깊은 첫 문장으로 손꼽는 것이 바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그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 한 땀 한 땀 정교하게 쓰였다고 알려진 이 감각적인 소설은 어느 계절에든 우리가 자리한 그곳을 깊은 눈의 나라로 바꿔놓는다. 상상력은 확실히 피서에(혹은 피한에) 도움이 된다.

척박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은 점점 거칠어진다. 여린 감성은 가차 없이 무시되고 자극의 강도가 강해야만 조금이라도 반응한다. 우리가 지금 가면을 쓴 채 살아가고 있는 거라면, 우리의 가면은 분명 단단하고 두꺼운 곰의 털가죽일 것이다. 아무리 높고 가파른 벼랑에서 떨어진대도 조금 긁히고 까진 정도일 뿐, 드러내 보일만 한 상처라곤 전혀 없는.

그러나 그 가면들 안에는 다른 이들에게 아픔을 들키지 않으려 숨죽여 흐느끼며 조용히 피 흘리는 ‘진짜 자아’가 있기 십상이다. 그 진짜를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할수록 가면은 두꺼워진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사람일수록 같이 격렬하게 맞대응하기보다는 그 거칠고 조악한 가면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자신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거의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금을 뿌렸을 때 쓰라린 곳은 작든 크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상처가 있는 곳뿐이다.

모든 소설은, 그리고 인문학은, 끝내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를 밝힌다. 그러하기에 피와 살점이 튀는 격전 속에서 부딪히고 깨져도 쓰러지지 않고 벌떡벌떡 일어나는 슈퍼 히어로 같은 존재는 될 수 없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는 특별한 정신질환이 아니라면, 피도 눈물도 없이 살육과 파괴를 일삼을 수도 없다. 대부분의 우리는 다친다. 베이고 까지고 피 흘린다.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도 마찬가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식의 표현인 ‘관능’은 대단히 섬세하고도 아련한 단어다. 인간이 서로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사랑한다는 것은 허약함을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의 폭신한 몸을 껴안거나 연인의 부드러운 몸을 쓰다듬을 때 우리는 잠시 가면을 벗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잊은 채 민낯으로 돌아간다. 눈의 나라, 설국의 사람들은 꼭 그런 민낯으로 살아갈 것만 같다. 이처럼 뜨겁고 자글자글 타오르는 한여름에 잠시 서늘한 꿈을 꾸어본다.

#김별아 #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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