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나날이다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07.03. 16:00

수정일 2015.11.16. 05:45

조회 986

책장ⓒ뉴시스

제자 자하(子夏)가 시경(詩經)의 구절을 들어 공자에게 물었다. “‘교묘한 웃음에 입맵시여, 아름답고 또렷한 눈맵시여, 흰 바탕에 화려한 무늬를 만들었구나.’고 한 말은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공자는 답하기를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이다(繪事後素).”라고 하였다. 자하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예(禮)는 나중입니까?” 이에 공자가 답하길, “나를 일으키는 자가 너로구나. 비로소 더불어 시(詩)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라며 기뻐했다.

--『논어(論語)』, 「팔일(八佾)」편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1

‘회자후소(繪事後素)’는 공자의 문예관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말로 알려져 있다. 말 그대로를 풀면 아무리 교묘하고 아름답고 화려한 그림도 흰 바탕이 마련된 후에 그릴 수 있다는 뜻이다. 흰 바탕이 본질이라면 나머지는 꾸밈이다. 한마디로 예의 본질인 내면의 덕성, 인격을 수양한 후에야 진정한 의미의 문학예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나날이다. 흰 바탕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채 흘러넘친 꾸밈이 거짓에까지 이르렀다. 현대의 작가에게 공자의 문예관을 따라 군자이기까지를 요구할 필요는 없겠지만 '표절'은 흰 바탕을 가장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방법이다. 게다가 거짓으로 거짓을 가리느라 교묘한 그림이 추악해지기까지 하였다. 당사자들은 끝까지 뻔뻔하다 못해 당당한데, 부끄러움은 왜 우리의 몫일까?!

부인할 수 없이, 문학은 이미 반죽음 상태다. 그런 문학이 저자거리에 끌려나와 조리돌림 당하는 모양새를 지켜보는 심경이 참담하다. 물론 문학, 그 자체라기보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위선과 세상의 질서를 고스란히 답습하는 문단의 허위를 질타하는 것이겠지만, 한때의 정백한 바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슴이 쓰리고 낯이 뜨거울 것이다.

공자 또한 막무가내로 예술가가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언지무문(言之無文), 행이불원(行而不遠)’, 즉 ‘말이 아름답지 않다면 그것을 펼쳐 써도 멀리 이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은 문학의 형식적 아름다움 또한 내용 못지않게 중요함을 강조한다. 문제는 애초의 흰 바탕, 언어를 부리어 쓰는 재주를 가진 사람의 태도다. 그의, 나의, 우리의 흰 빛은 정말 결백했는가?

문학도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무욕(無慾)할 수 없다. 일종의 욕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 문학에 ‘매혹’되었을 때, 그것을 통해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을 꿈꾸기보다 그것 자체에 마침내 닿기를 꿈꾸는 것이 ‘흰 바탕’이다. 문학이 돈을, 명성을, 상찬과 권력을 갖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그로써 처음이자 끝인 목적이었던... 그 순정한 욕망의 순간이 분명히 있다. 있었을 것이다.

바닥에 떨어졌을 때 바닥을 짚고 일어나는 건 그 바닥의 견고한 진실을 믿을 때라야 가능하다. 한때 거짓에 가렸던 눈이 시리도록 희디흰, 그 바탕 위에 다시 눈물의 성채를 쌓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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