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랑] 불암산을 빌려 살아왔습니다

내 손안에 서울

발행일 2015.06.29. 17:30

수정일 2016.04.07. 13:37

조회 2,777

서울시 홍보대사 배우 최불암

서울시 홍보대사 배우 최불암

“안녕들 하세요? 내가 여기 주인이우.” 삼삼오오 둘레길을 걷던 이들이 배우 최불암을 알아보고 반색을 하자, 그가 이렇게 인사했다. 어리둥절하던 사람들도 이내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최불암은 불암산(佛巖山) 이름과 같은 한자를 쓴다는 인연 때문에 지난 2009년 노원구로부터 명예 산주(山主)에 임명되었다. 그는 해마다 불암산보존회와 함께 산신제를 지내며 산과 산자락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행사 때는 인파에 휩쓸려 걷느라 주변 풍경을 하나도 못 봐요. 그런데 오늘은 참 좋네!”

최불암 씨는 정암사에서 학도암까지 서울둘레길을 1시간30분 남짓 걷는 내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화답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어린아이에게는 먼저 다가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너희들이 건강하게 자라라고 산에 이런 길을 만든 거란다. 산이 자연이고, 자연이 바로 너희들 자신이야.”

길을 걷다 발밑에 돌부리처럼 박혀 있는 나뭇가지를 보자 일행 중 힘을 쓸 만한 사람을 찾아 제거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바닥에 단단하게 박혀 있던 나뭇가지가 치워지는 것을 본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인사했다. “오늘 참 좋은 일 하셨네. 저거 때문에 십중팔구 누군가는 넘어졌을 거예요.”

마치 숲 속 오솔길이라는 작은 무대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그런 것이라고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 가시밭길 걸으며 뒤따르는 자식은 조금이라도 편하기를 바라면서 먼저 길을 다져온 사람들이 있다고, 그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일흔 중반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외모와 가벼운 걸음걸이 때문에 둘레길에서 그를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놀랐다. 서른한 살부터 <수사반장> 박 반장으로 18년, 마흔 살부터는 <전원일기> 김 회장으로 22년을 살아온 그였다. 일찍부터 노역을 많이 맡아 온 덕에 제 나이에 이르러 오히려 젊어보이는 걸까. 흑백 브라운관 앞에서 가슴 졸이던 아이들은 이미 박 반장보다 늙어 은퇴를 준비할 나이가 되었고, 양촌리를 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던 노인들은 세상을 떠나기도 할 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배우 최불암만은 저마다의 추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국민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그에게 많은 것을 투사해온 사람들은 최불암이란 노배우의 건재함에서 위안을 얻는다.

“이름이 너무 커서 어머니도 한번 불러보지 못한 채 / 내가 광대의 길을 들어서서 염치없이 사용한 / 죄스러움의 세월, 영욕의 세월 / 그 웅장함과 은둔을 감히 모른 채 / 그 그늘에 몸을 붙여 살아왔습니다. …(중략)…터무니없이 불암산을 빌려 살았습니다. / 용서하십시오.”

그가 자신의 자작시로 세운 불암산 시비 앞에서 시를 낭송하자, 주위를 빙 둘러선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다.

불암산에는 배우 최불암의 시가 새겨져 있다

불암산에는 배우 최불암의 시가 새겨져 있다

최불암 씨는 명예 산주를 맡아달라는 구청의 제안을 덥석 수락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먼저 그의 애송시로 시비를 세우겠다는 뜻만 받아들여 불암산공원에 윤동주의 ‘자화상’을 새겨 놓았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는 사내처럼 산을 찾는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기왕이면 최불암의 자작시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는, 만일 시가 완성되면 그때 명예 산주도 수락한다고 했다. ‘불암산이여!’ 라는 시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는데, 한 글자도 누구의 도움 없이 꼬박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시가 아니라 사과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본명은 최영한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미 곁에 남은 어린 영한이 무탈하게 자라길 기도하며 받아온 새 이름이 불암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차마 부를 수 없는 큰 이름이라며 간직만 하고 있었는데, 그가 배우로 데뷔하면서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어머니는 시인 박인환이 ‘세월이 가면’을 즉석에서 지어낸 곳으로도 유명한, 과거 문화예술인들의 단골집 명동 ‘은성주점’의 주인이었다.

한번도 “불암아!” 하고 아들을 부르지 못했던 어머니가 온 나라 아이들까지 읊어대던 ‘최불암 시리즈’를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주 좋아하셨겠지. 어머니는 예술을 사랑하고 유머를 아는 멋진 분이셨거든.” 그가 어머니 품 같은 불암산의 숲길을 걸으며 나직이 말했다.

서울둘레길 수락·불암산 코스 1-2구간(당고개역~화랑대역)

둘레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불암산

둘레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불암산

산이 장벽이라면 고개는 문이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어딘가 고개가 있다. 우리는 삶이 고단할 때마다 인생의 한고비를 넘어간다고 생각한다. 고비를 넘는 것은 분명 힘겨운 일이지만 고개라는 말 자체가 그 너머로 열린 가능성을 품고 있으니 다행 아닐까. 고개 너머에는 늘 우리를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철쭉동산에서 길과 길이 만나다

철쭉동산에 있는 둘레길 스탬프 우체통

철쭉동산에 있는 둘레길 스탬프 우체통

서울둘레길의 불암산 구간은 당고개역에서 시작한다. 우리나라에 당고개라는 지명은 몇 개나 될까.

<서울의 고개>라는 책에 소개된 당고개는 노원구, 용산구, 종로구 세 곳이지만 서낭당고개, 당재, 사당이고개처럼 비슷한 뜻의 다른 이름도 많이 있다. 높고 험한 고갯마루를 넘어가는 사람에게는 내딛는 걸음마다 안녕을 비는 마음이 늘 함께했다. 옛날 당고개를 오가던 사람들도 산짐승이 무서워 돌멩이 하나씩 손에 쥐고 조마조마하며 걸어야 했다. 무사히 고개를 지나고 나면 비로소 안심하며 손에 든 돌멩이를 던져놓았고, 그렇게 쌓인 돌무덤들 곁에 성황당이 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간절한 마음 닿는 곳이라면 사당이 있든 없든 어디든 사원이고 신전이 아닐까.

당고개역에서 상계동 골목길로 들어선다. 전신주 높은 곳에 붙은 둘레길 표지판을 따라 미로 찾기 하듯 골목을 지나면 산기슭에 다다른다. 불암산 철쭉동산에서 둘레길의 두 번째 빨간 우체통이 기다리고 있다. 철쭉은 지고 초록만 무성한 동산 위에서 수락산 둘레길 보조구간인 덕릉고개길과 불암산 둘레길이 만난다. 덕릉고개는 상계동에서 남양주시 별내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수락산과 불암산을 잇는다.

덕릉고개와 당고개의 전설을 넘어 숲으로

수락산 덕릉고개에서 철쭉동산으로 오는 길

수락산 덕릉고개에서 철쭉동산으로 오는 길

당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산짐승을 두려워했다면 덕릉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권력의 눈치를 봐야 했다. 고개 너머에 있는 덕흥대원군의 묘 때문이다. 덕흥군은 중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선조의 아버지로 아들이 왕이 된 뒤에 대원군이 되었다. 선조는 아비의 무덤이라도 왕릉으로 격상시키고 싶었지만 조정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자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들어오는 장사치들이 덕흥군의 능을 지나왔다고 말해야만 그들의 숯과 장작을 후하게 쳐서 사들이며 환대하게끔 했다. 발 없는 말도 천리를 가는 세상에 잇속 밝은 장사꾼들에 의해 묘가 능으로 불리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왕의 아들이고 아버지였으나 정작 자신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사내는 결국 소문으로만 능의 주인이 된 것이다.

당고개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사내로부터 비롯된 전설이 있다. 한밤중에 고개에서 봉변을 당하고 미륵불 품에 쓰러져 있는 어머니를 발견한 남매가 있었는데, 덕릉고개 전설보다 200년쯤 뒤의 이야기다. 사도세자를 모시던 궁녀가 궐 밖으로 나와 숨어 사는 동안 고아 남매의 양어머니가 되었는데, 그녀를 겁탈하려던 사람을 사도세자의 혼령이 물리치고 밤새 미륵불이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 자리에 미륵당을 세웠고, 훗날 양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남매에게 나라에서 효자 정문을 세웠다. 지금은 미륵당도 정문도 간데없고, 당고개는 서울지하철 4호선의 시종착역으로만 남아 있다.

뜨거운 바위에 기대는 불암산의 염원들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넓적바위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넓적바위

불암산은 산마루의 화강암이 승려들의 모자인 송낙을 쓴 부처의 형상이라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하지만 산 너머 남양주 별내면 산자락에 있는 불암사 일주문에는 하늘의 보배, 천보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남아 있다. 또한 붓 바위란 뜻의 필암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풍수에서는 먹과 벼루, 붓 등을 지명에 붙여 지세를 보완해왔는데 산 아래 월계동 벼루마을에서 유래한 연촌, 둘레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먹골과 묵동의 이름도 같은 연유로 생긴 것이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모두가 불암산의 독특한 화강암 바위로부터 생겨난 것만은 분명하다.화강암은 지구의 심장 가까이에서 솟구쳐 오른 뜨거운 속살이 하늘의 찬 기운과 만나 굳어진 바위다. 이웃한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이 모두 같은 시기에 분출한 마그마로부터 생겨났는데, 그중에서 가장 낮은 불암산 산마루의 정교하고 기이한 모양의 바위들은 남다른 품새를 자랑한다.

불암산이 낳은 명품 바위는 낮은 산자락 둘레길에서도 만날 수 있는데, 정암사에서 학도암까지 이어진 숲에 있는 남근바위와 넓적바위가 그것이다. 우선 정암사 들머리 오른편 길가에서 나무 계단을 오르면 하늘을 향해 곧추 서 있는 남근석을 만난다. 남근바위에서 고즈넉한 숲 속으로 길을 이으면 큰 나무 뒤에 숨은 듯 자태를 드러내는 둥그스름한 바위에 다다른다.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법한 불두덩 모양의 여근석이 넓적바위다. 두 바위 모두 바위 둘레에 금줄처럼 나무 울타리를 쳐 놓았는데,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불암산을 등지고 이웃한 형제의 산을 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과 수락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과 수락산

남근바위와 넓적바위 중간 즈음 배우 최불암의 시비가 있는 곳에는 불암산 둘레길 전망대가 있다. 수락산 둘레길의 전망대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대에 있어 숨이 차게 걸어 올라가야 하지만 불암산에는 낮은 자리에 망루를 세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나무 계단을 빙빙 돌아 2층으로 된 망루 위에 올라서면 눈앞으로 쏟아질 듯 가까운 불암산 바위에 압도당한다.그 우람한 바위들을 등지고 서면 이웃한 수락산과 도봉산에서 북한산까지 한 시절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뜨거운 마그마의 형제들이 한눈에 보인다. 서울의 동북쪽을 에둘러 지키고 서 있는 굳건한 산줄기들 때문에 그 아랫마을이 더욱 안온하게 느껴진다.

특히 도봉산은 철쭉동산에서 출발 할 때는 수락산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전망대에 와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니 더욱 반갑다. 불암산 정상은 북한산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어서 산길을 걷는 동안에는 도봉산이 줄곧 수락산 뒤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신동이라 불리던 일곱 살 때 지은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라는 시구가 저절로 떠오르는 풍경이다.

학이 머물던 자리에서 마애불의 눈으로

불암문고에서 등산객들이 책을 보며 여유를 즐기고 있다.(좌),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우)

불암문고에서 등산객들이 책을 보며 여유를 즐기고 있다.(좌),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우)

불암산 둘레길은 수락산과 비교하면 한결 완만하다. 순한 길 위에 열린 책장을 만들어 놓은 숲 속 북카페도 있다. 짐을 풀고 느긋하게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잠시 평상에 앉아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라도 가슴에 담아보면 어떨까. 불암산도 한 권의 뜨거운 책이라면 그 속에 책갈피처럼 펼쳐진 숲과 오솔길의 오래된 이야기에 귀를 열어본다.

만일 좀처럼 땀을 흘리지 못해 아쉽다면 둘레길에서 조금만 가파른 길을 올라 학도암에 들러보자. 학이 날아와 머물렀다는 수려한 풍광을 깎아지른 절벽에 앉은 마애불의 시선으로 내려다볼 수 있다. 학도암은 조선 인조 때 세워진 절로, 연꽃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거구의 마애관음보살좌상을 1870년(고종 7년)에 명성황후가 조성했다는 기록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임금이 후궁에게 얻은 첫아들을 총애하던 때 자식이 없던 왕비의 염원으로 새긴 불상이니, 이래저래 불암산 바위가 품은 사연은 뜨겁기만 하다. 바위에 기댄 마음이 불심이든 욕심이든 무겁게 느껴진다면, 다 내려놓고 맨발로 시원하게 걸을 수 있는 곳이 길 끝자락에서 기다리고 있다. 오뉴월 둘레길의 황톳길 위에는 아카시아와 이팝나무 흰 꽃들이 흩뿌려진다.

불암산 둘레길은 공릉산 백세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긴 숲의 터널에서 빠져나온다. 서울에 편입되기 전 양주군 공덕리였던 마을과 산 아래 태릉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든 이름이 공릉동이다. 백세문은 그 마을과 산 사이의 일주문이다. 산문 밖에는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불암산 주요 명소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서울의 주요 명산에는 늘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서울 노원구와 경기 남양주의 경계에 자리한 불암산도 마찬가지. 불암산에 조성된 하룻길(10km)과 나절길(8km)은 오래도록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 중 나절길을 중심으로 주요 명소들을 찾아가보았다.

서울둘레길 1-2 코스

서울둘레길 1-2 코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 (주소 : 노원구 중계로4길 2)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 (주소 : 노원구 중계로4길 2)

공릉동 백세문(百歳門)에서 출발하여 1.8km 구간의 등산로를 지나 104마을 갈림길에 들어서면 작은 벽화마을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나무 계단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려와 등산로를 벗어나면 바로 마을 텃밭이 이어지는데, 텃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면 마을로 진입할 수 있다.

과거 ‘104번지’였다는 데에서 이름을 따 ‘백사마을’로 불리는 이곳은 불암산 자락에 위치한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이다. 낮은 지붕과 담벼락, 녹슨 철제 대문은 언뜻 음산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이곳에서는 색색의 벽화와 만나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마을길 중간중간 만나는 아담한 상점과 마을 어르신들도 반갑다.

알록달록 고운 친구들이 많은, 제명호수 (주소 : 노원구 화랑로 815 삼육대학교 내)

알록달록 고운 친구들이 많은, 제명호수 (주소 : 노원구 화랑로 815 삼육대학교 내)

아카시아 향 가득한 길을 따라 600m가량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반복하다 삼육대 갈림길로 진입하면 길은 한결 더 착해진다. 삼육대 정문으로 이어지는 2km 구간의 이 길은 맨발로도 걸을 수 있다. 큰 숨과 웃음 섞인 감탄사만을 내뱉으며 이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둥근 호수를 만나게 된다. 삼육대학교 캠퍼스 뒤편에 자리한 ‘제명호수’다.

등산객과 비등산객의 교차점이 되는 이곳에서는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 소풍 나온 어른과 아이들, 삼육대학교 학생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이 된다. 여기에 물가바로 앞까지 마중 나온 색색의 비단잉어까지 더해져 화룡점정이 된다. 가을에는 단풍이 들어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바람을 충분히 느꼈다면, 제명호수 둘레를 돌며 호숫가의 바람을 즐겨보자. 호수의 규모는 꽤 큰 편이라서, 둘레를 도는 데만 10여 분이 소요된다. 그러나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에 걸을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시간의 흐름과 멈춤이 교차하는 곳 (주소 : 노원구 화랑로 681)

시간의 흐름과 멈춤이 교차하는 곳 (주소 : 노원구 화랑로 681)

공릉산 백세문을 들머리로 잡고 걸으면, 맨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조선 왕릉을 만날 수 있다. 그중 태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둘째 계비(繼妃)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능으로 이곳의 소나무 숲은 역사가 깊은 만큼 운치를 자아낸다. 또 태릉의 석물들은 문정왕후의 위세를 자랑하기라도 하듯 다른 능에 비해 1.5배에서 2배가량 크다.

조선 왕릉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전시해놓은 조선왕릉전시관도 태릉 입구에 있다.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아와도 좋다. 강릉(康陵)에서 태릉으로 이어지는 왕복 1시간 거리의 산책로는 아이들이 걷기에도 좋을 만큼 잘 정비되어 있다. 길 곳곳에서 만나는 꽃과 나무,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치유의 시간이 될 것이다.

○ 요금 : 1,000
○ 시간 : 09:00~18:00(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
  태릉 능침은 주말 오전 10시와 오후 2시 해설사, 지도위원 동행 하에 개방(혹서기, 혹한기 제외)
○ 문의 : 02-972-0370

출처 : 서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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