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터엔 죄인이 한 사람도 없네"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06.19. 14:10

수정일 2015.11.16. 05:46

조회 709

6·25 당시 주목받지 못한 학도병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포화 속으로` 모습 ⓒ뉴시스

6·25 당시 주목받지 못한 학도병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포화 속으로` 모습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제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린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전투에서 전사한 학도병 이우근의 수첩에서 발견된 부치지 못한 편지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79

군인 아저씨가 군인 오빠가 되더니, 군인 친구 같다가 군인 동생 같다가 마침내 군인 아들이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들이 점차 달라 보이더니, 내년이면 내 아들이 군인이 된다. 그래서 한글박물관의 기획특별전 <한글 편지, 시대를 읽다>에 전시된 학도병 이우근의 편지를 도저히 심상하게 읽을 수 없다. 절로 가슴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들, 그 착한 아들이 죄 없이 죽었다. 까닭도 모른 채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그리워하다가 스러져 버렸다.

독일의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는 그 유명한 《전쟁론》에서 “전쟁은 타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라고 언명하며 전쟁의 삼위일체로 첫째, 맹목적인 자연적 힘으로 여겨지는 증오와 적개심과 같은 본래의 격렬성, 둘째, 전쟁을 자유로운 창조적 정신활동으로 만드는 개연성과 우연성, 셋째, 정책적 도구로서의 전쟁을 전적으로 오성의 영역에 속하게 만드는 전쟁의 종속적 성격을 지목한다. 첫째는 주로 민중에, 둘째는 주로 지휘관과 군대에, 셋째는 주로 정부에 속하는 것...이라지만, 어떠한 이론과 주장보다도 김민기의 노래 <그날>의 가사가 더욱 통렬하다.

“싸움터엔 죄인이 한 사람도 없네. 오늘이 그날일까, 그날이 언제일까...?”

전쟁을 원한 사람, 전쟁을 일으킨 사람, 전쟁으로 이득을 볼 사람들은 정작 전쟁터에 없다는 것이 전쟁의 가장 큰 모순이자 본질이자 슬픔이다. 그곳에는 다만 어머니가 해준 밥을 상추쌈에 싸서 한 입 가득 베어 물고픈, 반드시 살아서 다시 만나야 할 사랑하는 아들들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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