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배 부자부터는 '스케일'이 달라진다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05.22. 14:31

수정일 2015.11.16. 05:48

조회 1,744

길ⓒ재빈짱

세간에서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이 길거리에서 죽는 법은 없다'고 하는데 빈말이 아니다.
무릇 사람들은 자기보다 열 배 부자에 대해서는 헐뜯고,
백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의 일을 해주고,
만 배가 되면 그의 노예가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다.
--사마천, 《사기》 <화식열전>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75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령이 우연히 만난 평범한 소녀에게 홀딱 반해 그만 사고를 치는 바람에, 졸지에 아이부모가 된 미성년자 부부가 시댁인 부잣집에 들어가 좌충우돌하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방영중이다. 이따금 가는 인터넷 요리 사이트에서 화제가 되고 때로 논쟁(?)으로 번지기에 관심이 생겨 지켜보노라니, 그 추이가 흥미롭다. 드라마에서는 분명 돈과 권력의 결합으로 형성된 위선적이고 괴악한 특권층과 그에 맞서는 이른바 '을'들의 반란을 그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특권층보다는 평범한 '을'에 더 가까울 것이 분명한 대다수 시청자들의 반응이 예상과 사뭇 다르다.

부자 시부모가 베풀어주는 것들에 감읍하지 못하고 말대꾸를 하며 대드는 며느리가 얄밉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고용인들의 편에 서서 시부모를 공격하는 며느리가 꼴사납다, 주제넘게 사돈댁에 폐를 끼칠 궁리나 하는 친정도 한심하다... 그러다 전형적인 미남 미녀가 아닌 주인공들의 외모 때문에 그들을 편들어주기 어렵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데서는 실소가 터졌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와 가까운 평범한 여주인공보다, 실제로는 한 번도 마주칠 일조차 없는 특권층에 더 감정이입을 하고 심지어 그들을 대신해 연민과 분노까지 터뜨리는 걸까?

돈의 소유, 돈의 흐름, 그리고 돈의 의미가 바뀌었을 때 세상은 변한다. 비로소, 마침내 변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비정한 진리가 역사를 통해 증빙된다. 아무러한 신념도, 아름다운 이상도, 그 근본을 뒤흔들지 못하는 한 다만 허황된 망상이거나 위험한 헛짓에 불과하다. 이러한 역사의 핵심을 찌르는, 인간이라는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의 욕망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출한 사가(史家) 사마천은 간명하게 이 모순을 설명한다.

열 배 정도 차이가 나는 부자라면 가까이서 접할 수 있고 그러다 보니 질투가 생기기 쉽다. 조금만 운이 좋았다면 저 자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과 시샘이다. 하지만 백배 부자부터는 '스케일'이 달라진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부의 규모에 두려움을 갖게 되고, 절로 머리를 조아리며 비굴한 선의(!)를 베풀게 되고, 마침내 그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세상의 기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종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런 떡고물이 떨어지지 않아도, 내가 내 노동을 제공하면서도 그처럼 터무니없는 짓을 한다.

그것은 돈의 힘에 굴복하는 일임과 동시에 아무리 노력해서도 그들에게 닿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자 체념이다. 차라리 애초부터 우리와 다른 존재, 존경하며 우러러보아야 마땅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그런 동경과 맹목이 사슬과 채찍 없이도 스스로를 노예로 만든다. 돈과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과 아우라 아닌 아우라, 이처럼 기묘한 희비극이 지금 우리 곁에서 시시각각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김별아 #빛나는말 #가만한생각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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