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게 염치없이 울고 싶을 때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04.24. 13:53

수정일 2015.11.16. 06:04

조회 621

비ⓒ포레스트

이 양파 켈러(지하 술집)엔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 가게에서는 양파를 써는 것으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중략) 가슴이 그토록 가득 차면 눈물이 가득 찬다고는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 특히 과거 수십 년 동안이 그랬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세기는 장래 '눈물 없는 세기'라고 명명될 것이다. 눈물의 씨앗이 되는 슬픔은 도처에 수두룩하게 굴러다니는데도, 그래도 슬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 눈물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양파 켈러에서 도마와 식칼을 80페니히로 빌고 밭에서 자라는 보통 양파를 12마르크로 나누어 받고, 그것을 잘게, 다시 잘게 썰었다. 그 즙이 그것을 달성해 줄 때까지 썰었다. 그 즙은 그러면 무엇을 달성해 준 것인가? 그것은 이 세상과 세상의 슬픔이 달성하지 못한 것을 달성했다. 즉 인간의 둥근 눈물을 자아낸 것이다. 이때 일동은 울었다. 마침내 또다시 울었다. 조심스럽게 울었다. 끝없이 울었다. 염치없이 울었다. 눈물은 흘러 떨어져 모든 것을 씻어 내렸다. 비가 왔다. 이슬이 내렸다.
-귄터 그라스 <양철북>(박환덕譯)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71

기기묘묘한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20세기의 문제작 '양철북'을 처음 접한 것은 귄터 그라스의 소설이 아니라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의 영화였다. 주인공 오스카가 비명을 지를 때마다 깨어져 나가던 유리병, 뱀장어를 잡기 위해 던져 넣은 소머리와 끝없이 정어리 통조림을 삼키던 어머니. 발작적으로 울려 퍼지던 양철북 소리... 그 의미를 깨닫기에 앞서 너무도 충격적인 이미지들이 이십여 년이 지나도록 눈앞에 생생하다.

소설 <양철북>은 캐나다에 머물던 시절 튜터 '조지'와 함께 영문판으로 다시 읽었다. 모국어로 읽어도 만만찮은 작품을 영어 공부 삼아 읽는다는 건 무모한 시도나 다름없었지만, 외국어로 더듬더듬 읽다보니 꼼꼼히 단어와 문장을 뜯어읽는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대학에서 예술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하고 소일로 튜터 과외를 하던 '조지'는 더없이 훌륭한 길잡이였다. 그는 독일에서 유대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탈출했다. 프랑스도 곧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체코와 영국 중에서 이주할 곳을 고민하다가 영국으로 갔다. 그때 체코로 갔다면, '조지'는 씩 웃어 보이며, 양 팔을 들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아우슈비츠의 굴뚝 연기를 그려 보였다.

나치와 아우슈비츠가 세계에 남긴 상처는 만만치 않다. '아우슈비츠 이후로는 더 이상 서정시를 쓸 수 없다'는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은, 그마마한 일을 겪은 후에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피해자들만이 아니라 가해자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졌다. 유구한 전통 속에서 그 기질과 문화가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알려졌던 독일인들은 스스로의 비이성과 야만에 화들짝 놀랐다. 집단의 최면과 광기에 사로잡혔던 과거는 족쇄가 되어 슬픔마저 유폐시켰고, 그들은 지하 술집에 기어들어 양파를 썰면서라도 잊었던 눈물을 자아내야 했다.

지난주 귄터 그라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전평화를 주장하는 양심적인 지성으로 알려졌다가 열일곱 살 때 나치 친위대(SS)로 복무했던 과거를 뒤늦게 고백했던(혹은 발각 당했던), 그에게도 <양철북>의 양파 겔러는 숨어들어 펑펑 울고 싶었던 맵싸한 비밀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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