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처로운 청춘들의 달큰함을 빌며

김별아(소설가)

Visit288 Date2015.04.17 14:10

꽃밭ⓒ뉴시스

황씨는 메밀을 많이 재배하는 지역에 살다 온 사람이었다. 그 메밀밭에서 어느 날 마을 처녀가 삽날에 발이 찍혔다. 삽날이 발을 파고들어도 예전 처녀들은 주저앉아 엉엉 울지 않았나보다. 울기는커녕 아픔보다 놀라움과 수줍음이 더 커서 아연실색한 채 삽날만 우두커니 쳐다보며 그 자리에 먹먹하게 서 있더란다. 황씨는 젊어서 딴 사람보다 신중했던 모양이다.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 혼자 있기를 좋아했으니 그 내성이 침착함을 키웠나 보다. 쩔쩔매는 처녀 앞에 척 나서서 삽날을 빼내고 삽날을 빼내자 생각난 듯 솟아나는 피를 처녀의 치마 한 켠을 찢어내 단단히 처매는 응급처치를 해줬던 모양이다. 그 짧은 순간, 이건 순전히 내 짐작인데, 처녀와 황씨는 소위 말하는 큐피드의 화살을 맞았던 것 같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제법 여러 유형의 남녀상열지사들을 지켜봐 왔다. 나 또한 사안을 곰곰이 들여다보기를 즐기는 사람, 그러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큐피드의 화살이란 대단히 신비한 무엇이 아니더라는 거다. 하늘이 내린 운명이나 해명할 수 없는 이끌림이 아니라 그저 순진한 청년과 무구한 처녀가, 단순히 몸을 밀착해서 신체접촉을 하게 되면 그게 곧 큐피드의 화살이 되기 십상이라는 거다. 물론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우연히 몸을 접촉하는 바로 그 일 자체가 일종의 운명일 수도 있겠지만.
“메밀밭 그 처녀 예뻤니껴?”
“얼굴이 이삔 거는 잘 몰래도 애기씨요, 그 아는 입술이 메밀대궁 같이 발갓드래요, 낯빛은 메밀꽃같이 희고… 치마에서는 메밀 꿀 같은 내음새가 났드랬소… 애처롭고 달큰했소.”
–김서령 산문집 《참외는 참 외롭다》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70

조금은 길지만 내용이 곱고 말맛이 좋아 그대로 옮겨본다. 짐짓 소심해 보이지만 치밀하고 진중한 청년과 엄벙덤벙 순진한 말괄량이 처녀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지는 것만 같다. 우연인 듯 필연이다. 발등을 찍어버린 삽날이 가슴까지 파고들고, 솟아오르는 붉은 피가 한순간 운명을 물들인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하필이면,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묘사가 고스란히 맞아떨어지는 그때 그곳이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의 걸음도 시원하다.”

그렇게 ‘탄생’한 신비를 김서령은 정확히 포착한다. 그녀는 이미 다른 참외들과 어울려 부대껴서는 열매를 둥글게 키울 수 없는 참외의 외로움을 보는 보배눈을 가진 인터뷰어다. 하지만 어떤 해석과 설명도 그저 ‘황씨’라고만 불리는 촌부가 스스로 설명하는 ‘운명’을 대신하지 못한다. 메밀대궁처럼 발간 입술과 메밀꽃처럼 흰 낯빛과 메밀 꿀 같이 훅 풍겨온 치마폭의 냄새…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할지라도 분분한 벚꽃처럼 마땅히 들썽거려야 하는, 애처로운 청춘들의 달큰함을 빌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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