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을 함께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시민기자 박분

발행일 2015.03.24. 14:16

수정일 2015.03.24. 14:36

조회 1,716

강서구 방화동 마을 수호신 나무

강서구 방화동 마을 수호신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산기슭에 풀꽃들이 앞 다퉈 피더니 강변 버드나무에도 어느새 새순이 돋았다. 곳곳이 봄의 소리로 들썩이는 요즘 동네 공원은 어떤 모습일까?

겨우내 한적했던 공원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강서구 방화동에 있는 느티공원에 가보았다. 삼정초등학교가 코 앞인 이 공원에는 수호신인 듯  마을을 오랫동안 지켜온 나무가 네 그루 있다. 그 중 400년 이상 나란히 어깨를 맞댄 채 서 있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들이다.

은행나무가 1972년에 보호수로 먼저 지정됐고 2년 뒤인 1974년, 느티나무도 보호수로 지정됐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현재 두 나무의 높이는 26m로 같다. 나무의 수령은 물론이고 수종이 다른데도 말이다. 동네 어르신들의 말에 따르면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나무들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하면서 키 재기 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나무들은 흐르는 세월에 힘이 부친 듯 이제 더 이상 키 재기를 멈췄다. 보호수 지정 당시의 수령이 은행나무가 435년, 느티나무가 480년으로 추정된 것을 감안하면 현재 수령은 500년에 근접해 있거나 이미 넘어섰다.

마을 수호신나무

오랜만에 만난 이 나무들은 수백 년의 성상을 견뎌낸 만큼 기골이 많이 쇠한 모습이다. 꼬부랑 할머니를 연상케 하는 구부정한 느티나무는 군데군데 옹이가 박혀 보는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그 옆의 은행나무는 표피 한 쪽을 아예 콘크리트로 보수한 모습이라 더욱 애처롭다. 하지만 오랜 세월 비바람에 상한 흔적을 감추진 못해도 혹한의 겨울을 보내고 봄마다 새잎을 틔워 너른 품으로 시원한 그늘을 내어주는 모습에는 변함이 없다.

이곳 은행나무는 조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정승 심정(1471~1531)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은행나무가 뿌리를 내린 마을의 원래 지명은 능리(陵里)였다. 우리말로 풀면 능마을로서 줄여 '능말'이라고도 불렸다. '능(릉)'은 언덕이란 뜻인데, 왕과 왕후의 무덤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덤이 주는 어두운 느낌을 피하려 옛사람들은 왕의 무덤을 언덕, 즉 '능'으로 불렀다고 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고려 말에도 이곳을 왕릉지로 삼았다. 어르신들은 가까이 개화산이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자리임을 강조한다.

보호수

예부터 마을 어귀에는 동네를 지키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계절을 먼저 알려주고 언제나 변함없이 맞아주는 엄마의 품 같은 나무 말이다.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레 나무 아래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고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에서 땀을 씻으며 쉬어 가기도 했다. 강서구 방화동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도 그런 나무들이다.

애향 능말 옛터

'개화산 정기 서린 능말 옛터, 이곳 능말 사람들이 수백 년을 대대로 살아온 정든 고향이 방화택지지구 개발로 그 자취가 사라지고 오직 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만이 홀로 여기 남으니 산 좋고 물 좋아 인심도 후했던 이 능말 옛터에 지난날 정겨웠던 추억의 아쉬움을 길이 후세에 남긴다.'

두 고목 옆에는 1992년 마을 주민들이 세운 애향비가 있어 가슴을 적신다. 이 거목들이 오랜 세월 능말 옛터를 지키면서 마을의 중심축이자 신목(神木)으로 있었던 만큼 오래도록 주민들 사랑을 듬뿍 받았으면 좋겠다.

#은행나무 #느티나무 #방화동 #거목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내가 놓친 서울 소식이 있다면? - 뉴스레터 지난호 보러가기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