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많이 가져야, 얼마나 높이 올라야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03.20. 17:31

수정일 2015.11.16. 06:06

조회 618

동상ⓒ리나

스스로를 승리자와 패배자로 가르는 이분법적 판단을 멈추면,
인생은 관리 대상이 아니라 가꿔나가야 할 선물로 바뀐다.
--대니얼 고틀립(Danial Gottlieb) 《마음에게 말 걸기》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66

정확한 출전을 찾다가 실패한 구절이 있다. 소설가 김훈 선생이 어느 인터뷰에선가 했다는, "조언은 충고의 형태가 아니라, 고백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는 말이다. 조언이랍시고 폭언에 가까운 충고를 하는 '멘토'들과, 흡사 피학적 성향을 지닌 맹신도 같은 '멘티'들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그 말은 풀죽은 고백밖에 할 수 없는 내게 적잖은 위로가 된다. 강력하고 강렬한 무언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부디 속지 마시길, 진정으로 삶과 사람을 이해하는 이라면 결코 남의 인생을 함부로 평가하고 개입하지 않는다.

충고가 수직적이라면 고백은 수평적이다. 나보다 '높은 곳'을 선점한 이의 교훈, 설득, 훈계는 고스란히 받아들이느냐 저항하며 거부하느냐 선택의 문제가 된다. 하지만 무릇 대화란 교훈과 설득과 훈계가 끝난 지점으로부터 시작된다지 않는가?! 엄밀히 말해 충고는 대화의 방식이 아니다. 반면 고백하는 이는 나와 같은 자리에서 눈을 맞추거나 심지어 나보다 더 '낮은 곳'에서 호소한다. 충고의 주어(主語)가 '너'라면, 고백의 주어는 '나'다. 그래서 고백은 이해하느냐 이해하지 못하느냐, 그것을 내 삶 속으로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된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철퍼덕 엎어져 충고의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를 터무니없이 낮추는 이유는 자신이 '루저', 즉 패배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혹한 전쟁에서 무력하게 패배했기에, 엉망이 되어버린 인생을 누군가에게 의탁하거나 누군가가 짜준 계획표에 따라 관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바로 승리한 사람들! 내가 갖고자 했으나 갖지 못한 것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져야 승리한 것이고 못 가지면 패배한 것이다. 그토록 단순하고 천잡한, 욕망의 공식이다.

하지만 소유도 성취도, 문제는 그 한도와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 가져야, 얼마나 높이 올라야 비로소 승리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의 몫과 자리를 곁눈질하며 나의 승패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남이 된다. 남의 것인 인생을 기신기신 관리하며 살아간다. 한번뿐인 인생이 얼마나 소중하고 신비로운 선물인지 영영 알지 못한 채 소유와 성취라는 횡재를 하지 못했다며 코를 빠뜨리는 것이다.

나 또한 고백한다. 한때 맹렬한 '파이터'로 살며, 나는 아무래도 행복하지 않았다. 이기기 위해서라기보다 지지 않기 위해 끝없이 빠른 스텝을 밟고 주먹을 날려야 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행복하다고 비명까지는 못 지르지만 최소한 불행하지 않다. 다만 그 싸움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승리자는 없었다. 삶이 이기고 지는 싸움이라면, 우리 모두가 패배자일 뿐이다.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내가 놓친 서울 소식이 있다면? - 뉴스레터 지난호 보러가기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