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로 담아낸 ‘장터’라는 삶의 현장

시민기자 김종성

발행일 2015.02.11. 13:00

수정일 2015.02.11. 16:01

조회 846

시대에 밀려 스러져가는 시골 오일장

시대에 밀려 스러져가는 시골 오일장

집에서 전철을 타고 갈 수 있는 경기도 성남의 모란장, 일산역 앞 일산장, 파주 문산역 앞 문산장 등 수도권에 있는 오일장 장터들을 알게 된 건 정영신 작가의 사진집 '한국의 장터'를 읽고서다. 특히 100년이 넘었다는 일산 오일장터에는 귀여운 강아지, 토끼들과 멋진 수탉과 암탉들을 볼 수 있는 가축장, 작은 트럭에 별별 것들을 다 싣고 다니는 만물상 아저씨, 뻥튀기 아저씨 기계 앞에 가만히 앉아 자신들이 가져온 각종 곡물을 양철통에 넣어 놓고 돌리면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펼쳐지는데 영락없는 시골 장터였다.

이 책에는 강원도 삼척 근덕장과 양양장에서 제주도 모슬포장까지 책 속엔 500개가 넘는 오일장터 사진들이 담겨 있다. 아직도 전국 동네방네 곳곳에 저마다의 날짜에 맞춰 오일장들이 서고 있다는 사실과 사진들을 보고 놀랐다. 전국의 시골과 소읍까지 들어선 대형 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들 틈바구니에서 이런 오일장터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자생하고 있다는 게 고맙고 여행 삼아 나도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마침 부부 다큐 사진가 정영신·조문호씨가 전국의 5일장 522곳을 30년간에 걸쳐 기록한 사진들을 모은 사진 전시회 '장에 가자'가 2월 17일까지 종로구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1987년부터 최근까지 28년 동안 전국의 전통시장 522곳을 돌며 만들어낸 작품 80여 점을 볼 수 있다. 추억 속 장터들과 동네주민·장꾼들의 삶, 장터의 변두리 풍경 등이 정겨우면서도 애잔하게 펼쳐진다.

오일장터 사진전 앞에서 추억을 나누는 어르신들

오일장터 사진전 앞에서 추억을 나누는 어르신들

오일장이 펼쳐지는 공간은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살아온 터라 딱히 고향이라고 할 것이 없는 내게 고향의 정감을 나눠주는 곳이다. 어릴 적 시골생활을 경험했던 사람들, 편하지만 팍팍한 도시생활이 왠지 내 삶 같지 않을 도시 이방인들에겐 오일장은 더더욱 고향 같은 편안함과 함께 회한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다. 부부 작가도 그러한 것을 느꼈는지 정영신 작가의 사진들은 감성적이며 푸근한 인간미가 넘치는 것들이 많고, 조문호 작가의 사진은 마트와 시대에 밀려나고 있는 장터에 드리운 그늘과 쓸쓸함이 느껴졌다.

전시장을 왼쪽부터 돌아보면 첫 작품은 정작가의 '희망을 엮는 집어등'으로 시작해 조작가의 '장날, 그 쓸쓸한 변두리 풍경'으로 끝난다. 흥정을 하며 물건을 파는 노인의 생동감 있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짐을 짊어진 노인의 쓸쓸한 뒷모습 사진들은 내 부모님 모습 같아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하기도 했다.

소중하게 지키고 보존해야할 생활문화 박물관, 오일장

"손주놈 오면 줄라고 넉 달 동안이나 시렁에 매달아 놓았는디, 손주놈은 안 오고 돈도 아쉽고 해서 장에 갖고 나왔는디 맛 좀 보시랑게잉, 맛있제이?"

전남 구례 오일장터에서 만난 곶감 파는 할머니 사진 밑에 써있는 작가의 짧은 글은 장터의 현장감과 인간미를 더욱 살려주었다. 사람이 그리워서 호박 한 덩이 갖고나와 온종일 바람하고 햇빛이랑 놀아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 그곳, 작가는 '사람이 고팠던' 한 노인의 사연도 전해주었다.

"한 노인이 농산물을 파는데 누가 그 남은걸 다 사가려고 하니 '안 된다'고 말합디다. 다 팔리면 집에 가야하니 싫다는 거예요. 조금씩 팔면서 종일 장터에서 놀겠다는 거지. 이렇게 장터는 상행위를 하는 곳만이 아니라, 그냥 사람 구경하는 놀이터예요."

오일장터라는 공간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다. 1970,80년대 고도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의 국민이 되었지만, 우리는 어쩌면 인간미와 마을 공동체 그리고 정다운 이웃사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약자를 배려하고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던 미풍양속이란 단어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도시 문명의 편리함과 바꾼 것들을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들이 모여 이렇게 오일장터가 남아있게 된 것일 게다.

오일장은 서구형 대형 할인마트처럼 대량으로 상품이 거래되는 곳이 아니라 5일간의 일용할 양식과 물품을 장만하던 소박한 유통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의 강점은 서구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인간들 간의 교류와 정이라는 무형의 물품이 함께 유통된다. 옛 부터 오일장은 소통의 공간이었다.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거나 교환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대처의 소식을 듣거나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는 광장이요, 공공의 공간이었다. 동학혁명이나 3.1운동도 장날을 고려해 전개되었다 하니 오일장의 사회적 의미는 지대한 것이었다.

두 작가 또한 "​장터라는 공간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그 지역의 생활문화를 꽃피우는 무대요, 전국에 흩어진 장터들은 우리가 소중하게 지키고 보존해야할 생활문화 박물관"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아는 사진은 당연히 컬러사진이지만 간간히 보이는 흑백 사진은 같은 장터라도 다르게 느껴졌다. 컬러색감을 배제한 흑백사진은 뭔가 본질적이면서도 직관적인 힘을 지녔다. 여름이면 따가운 햇살에 양산을 받쳐 들고 겨울이면 손난로에 의지해 떨면서도 떠들썩한 장터 바닥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흑백사진은 정겨우면서도 아릿하다.

힘든 일을 마치고 장터 구석의 선술집에서 목을 축이는 사람들, 자기 몸집보다 더 큰 봇짐을 머리에 얹고 집을 향해 분주한 발걸음을 옮기는 할머니, 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의 흑백사진은 뇌리에 오래도록 잔영으로 남을 것 같다. 장터 풍경사진도 그렇고 특히나 인물이 크게 들어간 사진은 그 사람의 표정 속에 숨은 내면에 대해 잠시 생각에 빠지게 했다. 디지털 카메라에 흑백사진기능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이유를 알 것 같은 사진들이다.

젖은 채소를 계속 만지느라 손끝이 하얘진 할머니의 손(진도 오일장)

젖은 채소를 계속 만지느라 손끝이 하얘진 할머니의 손(진도 오일장)

장터에 가면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장면들이 오롯이 담긴 사진들은 언뜻 '이런 사진은 나도 찍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보기는 쉬워도 사진에 담아내기 어려운 게 장터사진이다. 생계가 걸린 고된 장터 일을 하는데 낯모르는 타인이 와서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을 좋아하는 이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 전시장에 정영신 작가가 나와 있길래 어떻게 장터 사진을 자연스럽게 찍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던 점을 물어 보았다. 카메라보다는 먼저 인사를 건네고 물건도 사고 조금씩 얘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는다고. 오일장터에서 사진을 찍게 될 때 참고해야겠다.

오일장 가운데 가장 활기가 넘친다는 강원도 정선오일장

오일장 가운데 가장 활기가 넘친다는 강원도 정선오일장

○ 전시일시 ; 2월 17일까지 (오전 10시~오후 7시)
○ 아라아트센터 5층 ; 종로구 인사동 (관람료 무료)
○ 문의 ; 733-1981 (www.araart.co.kr)

#시장 #오일장 #장에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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