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책 100권 읽기를 시작합니다

시민기자 황정운

Visit3,941 Date2015.01.29 06:44

새해에도 100권의 책 읽기에 도전합니다 ⓒ 뉴시스

새해에도 100권의 책 읽기에 도전합니다

[100권 책읽기 프로젝트] (1) 여는 글을 대신하며: 나는 어떻게 100권을 읽게 되었나?

어릴 적 그래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Fingerprints of the Gods, 1995)’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2010년 겨울, 신년을 앞두고 한 서점에 들러 어떤 책이 나왔나 살펴보다가 마침 신간코너에 어릴 때 즐겨보던 ㄱ출판사의 책이 있어 무심결에 집어 들었습니다. 같은 출판사의 책을 자주 찾게 되는 건, 책을 구성하는 레이아웃이 제게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표지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읽기 시작한 한 권의 책이 그 뒤로 이어질 1년에 100권의 책 읽기 프로젝트의 첫 책이 될 줄은 전혀 몰랐지요. 1년에 100권씩 책을 읽은 지 벌써 4년째에 접어듭니다. 이 글을 시작으로 지난 몇 년 간의, 그리고 앞으로도 꾸준히 해보고 싶은 1년에 100권의 책 읽기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왜 하필 100권일까?’, ‘실제로 1년에 100권을 읽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왜 하필 100권일까?’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어떻게 목표를 정해서 책을 읽을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저는 소문난 독서광도 아니고 뛰어난 서평가도 아니며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딱히 전문분야가 있는 작가도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지만 그 정도는 다른 사람도 충분히 읽는 수준이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해서 만화책을 모으는 데 재미가 붙었습니다. 용돈을 모아서 만화책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지금도 부모님댁 제 방에 가면 그 만화책들이 고스란히 있습니다. ‘봉신연의’, ‘도라에몽’, ‘원피스’, ‘백귀야행’, ‘소년탐정 김전일’ 만화책들이 전집으로 책장에 있습니다. 다행히 결혼 후에도 부모님이 만화책을 버리진 않으셨더군요. 당시에는 만화책 몇 권을 끼고 새우과자나 감자칩 한 통을 사서 침대에서 읽다가 잠드는 게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읽으라는 고전 명작은 안 읽고 역시 남들 읽는다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지를 신나게 읽었습니다. 제가 중학생, 고등학생이던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는 판타지 소설과 무협지가 붐이었습니다. 이우혁 작가의 ‘퇴마록’,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라자’, 전동조 작가의 ‘묵향’ 같은 소설들은 굳이 저 뿐만 아니라 모든 남자아이들이 열광해서 읽었던 책입니다. 공부는 안 하고 이런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충분한 변명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읽고 소비하는 책이 아니라, 이런 책에서도 심오한 철학을 배울 수 있다는 변명을 속으로 되새겼죠. 실제 그런 책들도 있었습니다. 김민영 작가의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책은 온라인 게임을 소재로 하지만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둘러싼 주제의식을 잘 표현한 수작이지요. 그런 몇 권의 책을 방패삼아 열심히 판타지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 책은 3류 소설도 아니었고, 그 책을 읽은 시간도 3류 시간은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모든 경험은 어디선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 않은 길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인지, 고2 때 문과로 길을 정하게 되면서 오히려 과학책을 더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원래 이과를 가야 하는데 단지 적록색약 때문에 문과를 갈 수 밖에 없었다는 자괴감이 일부 있었습니다. 그래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조지 가모브의 ‘조지 가모브 물리열차를 타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대중적인 과학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칼 세이건을 좋아한 나머지 그가 교수로 재직했던 코넬 대학교에서 천문학을 전공하고 꼭 외계 생명을 만나겠다는 꿈을 가졌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3년 내내 학교 천문부에서 즐거운 추억을 여럿 쌓았습니다.

경영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에는 급격하게 책의 관심사가 바뀌었습니다. 경영학이라는 학문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경영학을 전공하고 사회에서 멋진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선배들의 삶을 동경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추천해주는 경영학과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에 ‘컨설턴트 책 추천, ‘경영학 필수 고전도서’ 등을 검색하면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현직 컨설턴트가 추천해주는 책 목록을 들여다보면 그 자체로 기분이 흐뭇해지기도 했습니다. ‘로지컬 씽킹’, ‘논리의 기술’, ‘꿀벌과 게릴라’, ‘포지셔닝’과 같은 책은 지금의 자기 반성적인 태도를 버리더라도, 그 자체로 훌륭한 책입니다. 다만 이런 책들은 스물 네다섯이던 그때 미래를 향한 티켓에 불과했습니다. 책이 아닌 책을 추천해준 사람들이 보였고, 그 사람들에 좀 더 가까워질 제 자신만 보였던 것이지요.

나에 대한 고민은 인문학 책읽기로 이어졌습니다ⓒ뉴시스

나에 대한 고민은 인문학 책읽기로 이어졌습니다

대학생에서 직장인으로 변신하여 회사생활을 해보니 가장 큰 고민이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학생 때는 내가 원하는 관심사를 찾아서 원하는 시간에 자유롭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의지만 있다면 내 정신과 영혼의 보충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 직장생활은 그것과는 많은 것이 달라지더군요.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나 자신의 고민에 대한 그 대안은 바로 책이었습니다. 그것도 인문학 책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인문학이란 내 삶의 풍요로움을 위해 얼마든지 시간을 내어 추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직장생활 이후에는 애써서 얻지 않으면 안되는 나 스스로의 삶을 버팀목이었습니다. 결국 내 모든 삶이 회사로 구성되지 않기에 그 이면에 있는 사회인으로서 나 개인의 성장도 관심을 갖고 들여다봐야 할 숙제였습니다. 사회인으로서 나 개인의 성장의 방향을 저는 인문학에서 발견한 셈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인문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경영학과 학생이 인문학 책을 읽으며 달라졌다고 멋있게 포장하고 싶지만 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2011년부터 조금씩 인문학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막막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일단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몰랐거든요. 회사 근처 서점에 가보면 날마다 수백권의 신간 도서가 쌓이는데 어떤 것이 좋은 책인지, 어떤 책을 읽어야 책을 읽는 시간 대비 아깝지 않을지 고민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생각한 것이 좋은 책을 추천한 좋은 작가의 책을 읽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책에 관한 책, ‘메타북’이라고 합니다.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이현우의 ‘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같은 메타북들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이랄까요, 어딘가 괴리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들이 추천해 준 책을 읽다보니 정작 나 스스로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직은 제 사유의 깊이가 그들과 같지 않아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일까 생각했는데, 좀 더 생각해보니 가장 큰 이유는 ‘관심의 차이’였습니다. 서로가 추구하는 바와 관심 있는 바가 다른데 그들 삶에 영향을 준 몇 권의 책이 꼭 내 삶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란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건 처음 관람하는 유명한 뮤지컬과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라고 추천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한 번도 그 노래를 들어보지 않은 뮤지컬을 보고 있는 관객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뮤지컬도 원래 내가 알고 있는 음악과 경험이 무대에서 재현될 때 더 진실되게 들리는 법입니다.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책을 추천해도 감흥이 없는 것은, 그 책과 저자가 깊이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나와는 서로 다른 길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결론적으로 인문학 책 읽기를 시작하려는 저에게 메타북은 큰 도움이 되진 못했습니다. 내가 읽는 책은 내가 계속 찾아보고 발견해나가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본질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문학 책을 읽자는 이정표만 세우고 좌충우돌 하다보니 자꾸만 책을 읽는 속도가 늦어졌습니다. 아무리 좋은 당위도 테두리 없는 당위는 결코 쉽게 실현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던 중 목표를 두고 책을 읽어야만 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당시 회사에서 제 직속 임원은 비교적 예술과 문학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 임원께서 부서 내의 책 읽는 문화 장려를 위해 각자 목표를 세우고 책을 읽으면, 가장 많이 읽은 사람에게 읽은 권 수에 만 원씩 계산해서 상금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책 읽기 목표를 100권으로 확 정해버렸습니다. ‘3일에 한 권씩, 주중에 읽기 힘들면 주말에 좀 더 읽으면 되니까 3일에 한 권씩 읽자!’하고 100권을 다짐합니다. 이렇게 2012년부터 1년에 100권의 인문학 책읽기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자면 100권의 책을 읽었지만 그 해 100만원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뭔가 기분 좋게 속았다는 기분이었지만 돈보다 더 큰 선물로 보상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임원께서 제 결혼식 때 주례를 봐주셨거든요.

돌이켜보면 100권의 책을 읽게 된 과정은 꽤 단순했습니다. 특별히 독서에 대한 투쟁심이 있던 것도 아니며, 단지 직장생활을 하며 느끼는 성장에 대한 갈증을 인문학 책으로 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트레이드 오프였지요. 100권이라는 숫자는 100만원을 기대했던 제 잘못된 귀에서 만들어진 숫자입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지나며 어느덧 4년차에 접어든 요새는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책을 빨리 읽은 날에는, 그 다음 책을 서문만 읽어봐야지 하면서 어느덧 100페이지 가까이 읽게 되는 날도 있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또 정말 많은 생각이 새로 생겨나게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 과정이 결코 즐겁기만한 것도 아니며 때로는 책을 읽는 것이 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했지요. 앞으로의 이 글은 지금까지의 메타북처럼 무슨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어떤 책을 권할만큼 제 자신의 사유가 깊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삶이 달라 生의 취향도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글은 지금까지 제가 1년에 100권의 책을 읽으며 느꼈던 여러가지 경험담이며,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왜’ 에 더 큰 의미를 두려 합니다. 서경식 선생의 입을 빌리자면 저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입니다.

​다음 편에 이어질 이야기는 그럼 도대체 수많은 책 중에 ‘왜 인문학 책일까?’, ‘나는 왜 책을 읽을까?’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 이야기는 처음 100권의 책 읽기를 시작할 때 제가 계속 스스로 답해야 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제게 책 읽기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반성하는 변증법적인 과정입니다. 이와 관련해 갑자기 생각나는 구절이 있네요. 가장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 한양대학교 임지현 교수의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라는 동유럽 역사에세이가 있습니다. 저는 평소에 서평을 쓰거나 훌륭한 글귀를 따로 적어두진 않습니다만, 이 책 중 한 구절이 몹시 마음에 들어 노트에 옮겨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구절은 지난 책 읽기를 돌아볼 때의 제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아 함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의 책 읽기라는 것도 지속적으로 어떤 주제를 지향하고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지난 독서경험의 과거와 단절하고 그 해체를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 뭐 그런 마음가짐일 겁니다.

결국 진정한 인문적 정신이란
지속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변증법적 정신인 것이다.

–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p.208, 임지현 씀, 강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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