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약하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다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12.26. 16:47

수정일 2015.11.16. 06:10

조회 1,589

감과 까치ⓒ연합뉴스

가난과 미천함은
근면과 검소함을 낳고

근면과 검소함은
부유함과 귀함을 낳고

부유함과 귀함은
교만과 사치를 낳고

교만과 사치는
가난과 미천함을 낳네.

--홍만종 《순오지(旬五志)》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55

인간은 약하다. 그래서 변한다. 인간은 약하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다.

처한 환경에 따라, 그 지위와 신분이 달라지면, 사람은 변한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일하며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니 점차로 부유해진다. 미천함에서 비롯되었던 검소함이 귀함의 표징이 되어 더욱 빛난다. 하지만 동시에, 환경이 바뀌어도 본디 타고난 바탕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부귀영화의 달콤한 맛에 흠뻑 빠지면 절로 사치스럽고 교만해지기 마련이고, 결국 돈과 명예를 모두 잃어 다시 가난하고 미천한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낳다'는 동사에 주목해 보면 이 변하되 변하지 않는 속성을 세대의 순환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가난하고 미천한 부모는 자식들에게 그것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피땀 흘려 노동한다. 그리하여 자식 세대에서는 희생의 대가로 부유함과 귀함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무상으로 제공받은 부유함과 귀함은 독이 되기 십상이다. 자신이 누리는 풍족한 재산과 높은 지위를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얻기까지의 과정에 깡그리 모르쇠를 잡는다. 그리하여 무지의 교만, 무지의 사치는 마침내 부와 명예의 상실로 이어진다. 무릇 오르막에 오를 때 2시간이 걸렸다면 내리막은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얻기는 어려웠으나 잃는 것은 순간이다. 삼대(三代) 부자 없다는 말은 이와 같은 어리석은 순환에 대한 오래된 통찰이다.

뉴스를 연일 장식하는 어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의 폭주와 탈선을 바라보며, 새삼 옛사람의 진언을 떠올린다. 1억 짜리 코트를 걸치고 1천만 원짜리 목도리를 두른다 해도 다만 죄인의 몰골이다. 지나치게 많은 돈이 아니었다면 그는 좁은 좌석에 몸을 구겨 넣은 여느 사람들처럼 어느 불편함이나 불쾌감이라도 기어이 참아냈을 것이다. 제 능력과 상관없이 얻은 높은 지위가 아니었다면 때와 장소에 따라 어떤 예의가 필요한지,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눈치라도 챘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나친 부유함과 귀함이 결국 그 마음의 가난과 미천함을 폭로하고야 말았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독이다.

부를 가졌을 때 자비롭게 베풀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높은 지위에 올라 진정으로 겸손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남의 밥그릇을 걷어차지 않고, 남의 머리를 찍어 누르지 않고 자신의 힘과 여유를 확인할 수는 없는가?

지극히 순진한 듯한, 그러나 간명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또 다시 던져 본다. 언제고 끊임없이 돌고 도는 삶의 원판 위에서, 지금 움켜쥔 것이 영원하리라 믿는 어리석음이 분노보다 슬픔을 자아낸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이,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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