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변호인'에서 '미생'까지

하재근(문화평론가)

발행일 2014.12.23. 13:09

수정일 2015.11.17. 18:47

조회 614

왼쪽부터 시계방향 변호인, 명량, 님아그강을건너지마오, 미생, 정도전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컬처 톡’ 76

2014년은 천만 영화 <변호인> 열풍과 함께 시작됐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바로 국민이다'라고 외치며 힘없는 학생을 변호하는 수호자에게 국민이 열광한 것이다. 뒤이어 정조를 다룬 <역린>이 흥행에 성공했고, 드라마 <정도전>이 정통사극 전성시대를 다시 열었다.

국민들은 서민을 지켜줄 지도자를 갈구했다. 지금 현재의 지도층과 사회시스템이 서민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갑과 을에게 어떤 신분적 격차가 있는지를 '땅콩회항' 사태가 똑똑히 보여줬다. 대중이 선망하는 항공기 승무원조차도 갑에겐 천민이나 다름없었다. 이런저런 '갑질'에 치어 벼랑끝까지 몰린 서민이 기댈 최후의 보루인 공적 시스템마저도 신뢰를 잃어버린 상황. 이런 상황 속에서 터진 불안이 믿을 수 있는 지도자에 대한 열망을 낳았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여름에 <명량>의 1,700만 관객이라는 기록적인 흥행이 나타났다. 이순신 장군이 서민을 지키는 영웅으로 묘사된 작품이 개봉하자마자 국민적인 순례의 열기가 터졌다. <변호인>이 국민을 말했던 것처럼 <명량>도 '장수의 충은 백성을 향한다'면서 국민을 섬기는 리더십을 내세웠다. 현실에서 국민을 섬기는 지도자를 별로 보지 못했던 국민들은 <변호인>과 <명량>을 각각 천만 영화로 만들어주고, 위민의 영웅 <정도전>을 사극 히트작으로 만들었다.

구중궁궐에서 특권을 누리며 사는 갑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드라마 <밀회>도 인기를 끌었다.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속해있는 '그들의 세상', 즉 재벌가를 그린 작품이었다. 그 세상 구성원들이 얼마나 속물적이며 특권의식에 젖어있는지 묘파한 작품에 을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불안에 떨며 사는 을들의 처지를 묘사한 작품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바로 <미생>이다. 이 작품은 처음에 직장을 구하지 못하거나 비정규직에 머물러 있는 88만 원 세대, 즉 20대의 불안을 그렸다. 그런데 작품이 진행되면서 20대가 부러워하는 정규직 대리나 과장, 차장마저도 갑 앞에선 모두가 을일 수밖에 없는 미생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모두가 선망하는 항공기 사무장마저도 '땅콩회항'의 갑 앞에선 미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땅의 20대 구직자부터 정규직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미생을 자처하며 <미생>의 팬이 되었다.

세월호 사태의 해양마피아 논란에서 땅콩회항 사태의 항공마피아 논란에 이르기까지 2014년은 공적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붕괴된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장기간 지속된 군대 인권유린 스캔들도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서민들의 냉소를 키웠다. 미래 전망도 불투명하고 공적 시스템도 믿을 수 없을 때, 힘이 없어 갑질에 치이며 살아야 할 때,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돈뿐이다. 돈에 대한 절대적 숭배가 나타났다. 아랍 부자 만수르가 단지 부자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스타가 된 것이다. 한국인들이 만수르 SNS로 몰려가 돈을 달라고 구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보성의 의리 신드롬도 공적 신뢰의 붕괴로 사적 신뢰의 가치가 올라간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대중문화를 통해 위안을 찾았다. 그리하여 아무 것도 안 하는 예능인 <삼시세끼>가 연말에 떴다. 게임, 장기자랑, 미션 등 그 어떤 예능적 설정도 없이 농촌에서 밥 해 먹고 농사짓는 게 다인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깜짝 흥행이 터졌다. 이 두 작품의 성공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불안한 시대, 각박한 세상에 지친 국민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휴식과 따뜻한 위안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그 누구도 완생이 아니라는 엄혹한 현실에서 모두에게 불안이 엄습하는 상황, 그래서 2014년에 대중은 지도자를 열망했고, 현실의 엄혹함을 리얼하게 그린 작품에 공감하며, 따뜻한 작품들을 통해 위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힘든 한 해 불쌍한 국민들이었다.

#미생 #변호인 #정도전 #명량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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