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사도세자 등 사극 속 21세기형 영웅들

하재근(문화평론가)

발행일 2014.11.25. 17:38

수정일 2015.11.17. 18:52

조회 939

드라마 장면 (뉴시스)

드라마 <왕의 얼굴> 장면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컬처 톡’ 72

사도세자를 주인공을 내세운 사극드라마 <비밀의 문>이 방영되고 있는 가운데, 광해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왕의 얼굴>이 새롭게 시작됐다. 사도세자는 <무사 백동수>에서도 중요하게 부각된 바 있고, 광해군은 영화 <광해>를 통해 천만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왜 이런 인물들이 요즘 들어 부각되는 것일까?

과거엔 세조(수양대군), 한명회, 태종 이방원, 이성계, 이순신 장군 등이 집중적으로 조명 받았었다. 그러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열광이 지속되는 가운데에 정조가 사극계의 최고 스타로 급부상했고, 세종대왕이나 사도세자, 광해군, 소현세자 등이 재조명되는 추세다.

이것은 국민의 열망이 사극에 투영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거 사극은 그저 옛날 이야기 오락물로서 드라마틱한 권력투쟁의 주인공이나 전쟁영웅에 초점을 맞췄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든 이후엔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닌 어떤 가치를 위한 싸움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바로 그 가치에 현재 대중의 열망이 투영된다.

세종대왕 시기는 태평성대였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사극용 소재로는 부적당하다고들 여겼었다. 그러나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과 그 아버지인 태종의 대립, 또 한글반포를 둘러싼 사대부와의 대립에서 갈등구조를 찾아냈다. 태종은 권위주의적 억압의 정치, 1인자 독재의 정치라는 가치를 주장하는 데에 반해 세종은 소통과 포용의 정치, 극단적 대립이 아닌 공존의 정치를 주장했다. 바로 소통과 탈권위주의를 원하는 대중의 열망이 세종에게 투영된 것이다.

한글도 그렇다. 세종은 최하층 서민까지도 문자로 소통할 수 있도록 쉬운 문자를 만들어 배포하려고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통로, 즉 사회의 언로를 개방해 수직적 사회를 수평적 구조로 혁신하려 한 것이다. 반면에 사대부들은 자신들만이 어려운 문자를 독점해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다. 한글은 말하자면 조선판 SNS였던 셈이다. 대자본이 독점하는 기존 언론에 비해 일반인 누구라도 자유롭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SNS라는 통로는 한글의 기능과 유사하다. SNS 수평적 소통에 열광하는 네티즌은 <뿌리 깊은 나무> 세종대왕에도 열광했다.

세종 이후로는 훈구 대신과 사림 사대부의 대립 시대가 펼쳐지는데, 이 시기에선 21세기의 대중이 영웅을 발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림이 기득권에 맞서는 개혁세력이긴 하지만 이들도 결국 조선의 기득권 집단으로 발전해간다는 걸 시청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림 속에서 현재 네티즌이 공적으로 여기는 노론이 나온다. 그래서 사림에 대한 응원 현상은 나타나지 않고, 세종에서 바로 임진왜란으로 넘어가 나라 지킨 이순신이 영웅으로 소환된다.

그 다음이 광해, 소현세자,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흐름인데, 이 흐름 속에서 영웅들은 모두 노론에 맞서 싸운다는 공통점이 있다. 광해는 노론의 모태가 되는 서인의 반정에 의해 왕위를 잃고, 소현세자는 노론의 가치에 맞서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며, 사도세자도 노론에 맞서다가 비명횡사했다. 정조 역시 노론에 맞서 남인을 중용하다가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다. 정조 이후론 '감히' 노론에 맞서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영웅이 등장하지 않다가, 구한말에 가서야 대원군이 다시 조명 받는데 대원군은 노론 세도정치에 맞선 인물이었다.

이렇게 보면 21세기에 사극이 주목하는 조선의 영웅들이 왜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집중되는지를 알 수 있다. 바로 그 시기가 서인(노론)과의 마지막 혈전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때 노론에 맞선 지도자들을 이 시대의 네티즌은 영웅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과거 폭군이나 정신이상자로만 알려졌던 광해군과 사도세자가 주역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노론은 기득권 수호, 불통, 차별, 부의 독점, 사대주의 등의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다. 그 대척점에 있는 영웅들은 서민 중심, 소통, 평등, 복지, 자주성 등의 가치를 상징한다. 가치의 대립구도가 대단히 현재적이다. 결국 지금의 사회에서 잉태된 열망이 사극 속에 투영된다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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