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저 물고 태어난 `행운아`가 과연 `행운아`일까?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08.14. 14:26

수정일 2014.08.14. 14:26

조회 2,420

풍경(사진 wow서울)

사람에게는 세 가지 불행이 있다.
첫 번째 불행은 어린 나이에 과거 시험에 급제하는 것이고,
두 번째 불행은 부모형제의 권세를 빌어 좋은 벼슬을 하는 것이며,
세 번째 불행은 높은 재주가 있어서 문장을 잘하는 것이다.

--정이(程頤), 《소학》 <가언편> 중에서

[서울톡톡] 세상살이가 힘겨워지다 보니 운명론자들이 부쩍 늘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지고, 그 과정이 너무 힘겹다 보니 절망에 빠져 '조상 탓'을 하는 것이다. 본래 못되면 조상 탓이요 잘 되면 제 탓이라는 속담이 있기는 했지만, 심지어 능력이나 노력보다 금수저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편이 낫다고 한다. 퀴퀴하고 질척한 과거를 떨치고 승천하느라 용을 쓴 '개천용'보다는 무위도식에 허랑방탕할지라도 꽃자리를 깔고 앉은 부잣집 가운데 자식이 낫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태는 일차적으로 교육이나 개인적 성취에 의해 '신분 상승'이 불가능해지고 계급이 고착화되어가고 있다는 우울한 증거다. 명문대를 나와도, 고시를 패스해도, 예전처럼 '사짜' 직업을 가져도 부자 부모를 둔 '상속자'만 못하다는 탄식이 쏟아진다. 한편으로는 명문대나 전문직, 모두가 원하는 좋은 직장에는 상류층 자제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현상이 빚어진다. 그런데 이런 신분의 세습이 과연 일방의 손해일까?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 승승장구하는 행운아는 세상의 모든 불행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을까?

북송의 철학자 정이는 형인 정호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라 불리는 정주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일찍이 어려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수차례 천거를 물리치다가 50이 넘어서야 벼슬에 나갔다. 그래서 정이가 말하는 '세 가지 불행'은 스스로를 경계하는 듯도, 해명하는 듯도 하다. 초년 출세와 음덕(蔭德:조상의 덕)과 높은 재주....... 그런데 정이가 인생의 가장 큰 불행으로 손꼽는 이 세 가지야말로, 작금의 세태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행운이자 행복의 조건이 아닌가?!

물론 '20대의 성공'을 이상으로 삼고, '낙하산'을 쉽고 편리한 지름길로 생각하며, 문장을 '커뮤니케이션 스킬'로 여기는 사람들에겐 케케묵은 고담준론으로 들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이가 굳이 '불행'이라는 무게 있는 말로 경계했던 뜻을 곱씹어 보면 이해하기 싫을지 몰라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어린 나이에 성공한다는 것은 실패의 경험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이나 행운만 믿고 자만하다가 중장년에 크게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맹자의 "나아가는 것이 빠른 자는 그 물러남도 빠르다(進銳者 其退速)."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런가 하면 집안의 배경과 부모의 '빽'으로 성공하면 언젠가 부실한 자기의 실력이 뽀록나고야 만다. 또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그만큼 날카로운 말과 글로 사람들을 상처주어 적(敵)을 만들 가능성이 커진다.

당장에는 모른다. 달콤한 성공과 성취 뒤에는 반드시 대가와 보상이 따른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성공한 사람들의 몰락과, 뒷배가 사라져버린 어른 아이들의 파산은 더욱 참담하다. 인생에는 절대 공짜가 없고, 길고 먼 인생길에 치러야 할 노자는 행복과 불행을 에끼고 나면 결국엔 우리 모두를 빈털터리로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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