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이어 달리는 사람들의 바톤 존

서울시설공단

발행일 2014.07.23. 00:00

수정일 2014.07.23. 00:00

조회 952

우표

[서울톡톡] "우린 과거를 모았다가 필요한 사람들한테 전해주는 거예요." 사실, 우리 사이에는 시간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 숨어 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벤자민 버튼도 아니지만 과거의 시간을 모으고, 이 시간을 이어받을 미래의 주자를 기다리는 사람들. 바로 수집가다. 1800년대와 1900년대, 2000년대를 넘나드는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 시간 여행의 메카가 있다고 해 취재팀이 직접 가 보았다. 회현지하상가의 서울우표사다.

우표에서 시작해 근대사 자료로

서울우표사의 안광균 대표는 1975년에 수집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방의 한 학교 앞에서 골동품 가게를 열었다. 그런데 손님들은 골동품보다 안 대표가 재미 삼아 모아 본 우표를 더 좋아했다. 결국 모아두었던 우표를 다 팔고, 다시 수입해서 팔면서 우표 수집상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7, 80년대는 누구나 우표를 수집했다. 한창 우표수집이 붐일 때는 백화점 1층 가장 좋은 자리에 우표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점점 우표를 찾는 사람들은 줄어들었다. 대신 과거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자료를 모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안 대표 역시 그 흐름에 따라 수집품의 범위를 근대사 자료로 넓혔다.

처음은 사진 엽서였다. 우표를 취급하다 보니 연결되어 자연스레 들어왔다고 한다. 1900년대 초 우리나라의 풍경과 풍습을 담은 사진 엽서들이 가득한 정리함 안에는 당시의 서울, 인천 모습이나 평양역처럼 지금은 가 볼 수 없는 북한 지역의 풍경들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선비와 농민, 기생과 아이를 업은 여인까지 당시 사람들의 모습 역시 선명했다

18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차곡차곡 시간을 모아 놓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들이 가득하다. 대한제국 시기부터 1960년대까지 우표나 엽서는 물론 포로우편, 사진, 신문, 담배 포갑지, 상표, 서적처럼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모든 것이 있다. 5,60년대의 채권, 상점 거래 영수증, 보험 증서, 전당포 담보표 같은 자료들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했던 보통 사람들의 삶을 증언한다. '미시사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 중 2,30년대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사용했던 여행용 종합 바우처가 취재팀의 눈에 띄었다. 배와 기차를 갈아타며 중간에 밥도 먹고, 잠도 자면서 여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표를 모은 것으로 요즘의 에어텔 여행 상품과 비슷했다. 1961년 시행된 농어촌고리채정리사업의 심사 판정서, 1973년 새마을사업 지붕 개량 융자 신청서 같이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자료들도 이곳에는 종류별로 빼곡했다. 역사를 연구하는 학생과 학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보물창고. 실제로 연구자들이 종종 찾아오고, 박물관으로부터 납품을 요청 받고 있다고 한다.

이미지설명

① 이곳의 단골 고객들이 만든 우취 작품집
② (반시계 방향으로)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우표 저금대지, 1960년에 체신부에서 발행한 저금대지, 1946년 해방 직후 전화요금을 우표로 납부한 용지
③ 시모노세키에서 여수항을 경유해 기차로 남원/대전/벌교/보성으로 여행할 수 있는 1개월 짜리 티켓

지금은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거래할 수 있어 편리하지만, 95년까지만 해도 이 모든 자료를 안 대표가 발로 뛰어 구했다. 1년에 백 일 이상을 외국에 나가있던 때도 있었다. 상인이니까 판매는 당연히 하는 거지만, 수집가로서 세계를 뛰어다니며 하나하나 찾아내고 손에 넣은 스토리가 생생해 하나씩 팔려나갈 때마다 못내 서운하기도 하다.

"가격이 어느 정도 하겠다는 건 느낌으로 알아요. 40년 가까이 하다 보니 감각이 생기죠. 오랫동안 못 본거고, 어느 때 나온 어떤 것보다 귀한 거다. 예를 들면, 해방부터한국전쟁 사이의 자료가 가장 귀해요. 1800년대 것보다도 오히려 더 보기가 힘들거든. 공부도 하긴 하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학자들 몫이고 우리는 자료를 찾아서 모았다가 필요한 사람들한테 전해주는 거예요."

이미지설명

④1930년대 신세계 백화점, 한국은행, 남대문등 서울의 풍경과 풍습을 볼 수 있는 사진 엽서
⑤ 구한국, 일제 시대보다도 귀한 해방 직후의자료들. 사진은 오분리건국국채와 해방 기념 엽서
⑥ 미국의 키스톤뷰컴퍼니에서 1904년에 제작한 입체 사진(stereoview)과 입체경 (stereoscope). 제목은 'House building in Chosen'이다.

우표는 단순한 우표가 아니다

우표 수집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고 해도, 다른 이유로 우표를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이곳의 단골손님 중에는 우표만으로 자동차 발달사를 보여주는 책을 만들어 국무총리상을 받은 사람도 있고, 우표를 교구로 어린이들에게 역사 교육을 하는 박물관 관장도 있다. 취재 중에도 카자흐스탄의 한 유명 배우가 우표를 사 갔는데, 그가 모은 우표 만으로도 영화계를 주름 잡았던 전세계 배우들의 얼굴을 대부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특정 주제를 잡아 연구 논문을 쓰듯 내용을 기획하고 그에 따라 오직 우표만으로 그 주제의 A부터 Z까지 소개하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우표 디자인이 철저한 조사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완성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편, 우표의 도안이나 사용된 종이, 인쇄 등을 연구하며 모으는 사람들이나 우편 배달 시스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소인이 찍힌 자료를 모으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활동을 특별히 'Philately', 우리말로는 '우취'라고 한다. 우표수집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학문적 취미다.

우표가 자료로서만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우표가 '돈'으로 사용되었던 흔적도 볼 수 있다. 과거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나라에서는 화폐 대신 우표를 통화로 사용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년 전까지 우표로 예금을 할 수 있었다. 화폐로 사용되었던 외국 우표, 돈 대신 우표가 붙은 '우표저금대지'와 통화 요금표 같은 자료들이 이곳에서 그 시절을 생생히 증명하고 있다.

단 17일 간 사용된 100조 달러짜리 지폐

수집은 과거를 미래에 건네주는 것

안 대표는 서울우표사의 단골 손님들을 '연어'라고 표현했다. 70년대 우체국에 줄 서서 우표를 사던 사람들이 회귀본능으로 찾아온다는 것. 당시에는 다들 넉넉지 않아 조금씩 사고 만족해야 했던 분들이 연어처럼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수집이란 과거를 모아 미래에 전달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법이다. 그래서 서울우표사의 시간은 흘러가 버리지도, 멈추어 버리지도 않은 채 잠시 고요히 머물러 있다. 다음 세대로 자신을 넘겨 줄 수집가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수집가들의 거래가 점점 온라인으로 주무대를 옮기는 만큼, 서울우표사도 온라인 거래에 주력하고 있다. 안 대표의 아들이 일을 배우며 대를 이어 함께 하고 있는데, 주로 오픈마켓 거래를 돕고 있다.

안 대표는 인터뷰 말미에, 젊은 친구들이 오면 좋은데 숫기가 없어서 못 들어온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자, 이제 숨겨왔던 정체를 드러내자. 지금의 2, 30대 치고 왕년에 '따조', '띠부띠부씰' 같은 것들 안 모아 본 사람 없지 않은가. 새롭게 무언가를 모아보고 싶은 사람, 지나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신기한 물건의 정체가 궁금해진 사람, 우리나라의 옛 모습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이라면 조금만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가보자. 시원한 차 한 잔과 함께 재미나고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지나가다가 머뭇머뭇하는 젊은 친구들이 있어요. 궁금하긴 한데 막상 들어와 보긴 좀 그런가 봐. 우리 문턱은 없는데(웃음). 와서 물어보면 어떤 방향으로 수집 시작하면 좋은지 다 말해 줘요. 근데 사실 최고는 뭐든지 손에 잡히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쉽게 접할 수 있는 거부터."

"제일 사랑하는 건 이런 것들 아니고 손주"라고 웃으면서도 젊은 친구들이 부담 없이 다가오면 좋겠다고 말하는 안광균 대표. 그는 오늘도 이곳에서 열정과 사명감으로 시간을 이어 달릴 젊은 수집가를 기다리고 있다.

■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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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 4호선 명동역 5번 출구, 회현역 7번 출구)
전화번호:02-756-2737

* 위 글은 서울시설공단(http://sisul.or.kr)에서 발행하는 지하도상가 매거진 G:HA[지:하]를 편집한 것으로 매거진 전체보기::링크새창베네핏 매거진(http://www.benefit.is/)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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