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들이지 않은 것은 시간을 버틸 수 없다

서울시설공단

발행일 2014.07.09. 00:00

수정일 2014.07.09. 00:00

조회 931

타자기

[서울톡톡] 인터뷰를 준비하는 동안 대표로부터 종이 한 장을 건네받았다. 이게 뭔가 싶었는데 A4용지 한 장 가득 자필로 쓴, 일종의 '가게소개서' 같은 거였다. 정갈한 글씨와 '취미 수집은 낭만이다.'라는 제목만으로도 에디터는 어느 시대로부터 날아온 편지를 받아본 느낌이었다. 빛바랜 종이에 가게 내력과 운영 철학이 가지런히 적힌 글을 읽다 보니 좋아하는 프랑스 속담이 생각났다. '시간을 들이지 않은 것은 시간을 버틸 수 없다.' 점점 이 가게의 물건들과 대표의 시간이 궁금해졌다.

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식들

정각이 되자 시계는 종을 울렸고, 카메라에서는 찰칵 소리가, 턴테이블에 바늘을 올리자 우드혼(Wood horn)에서 간드러진 처녀 뱃사공 선율이 흘러나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순간, 취재팀을 둘러싼 물건들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움직이게끔 해서 팔아요. 나는 고물을 파는 게 아니에요. 살아있는 앤틱을 주는 거지. 오래 보존 잘해주길 바라고, 생명이 있는 상태에서 줘야지요."

올해로 11년째 유진컬렉션을 운영하는 김무송 대표는 출판계에서 근무하다가 60대에 은퇴하고 본격적으로 취미수집에 뛰어들었다. 도자기처럼 정적인 물건보다 라디오나 축음기 같이 움직이면서 소리 나는 것에 이끌려 카메라, 타자기, 시계, 선풍기, 영사기, 전화기, 릴 데크 녹음기들을 모았다.

"수집을 많이 해서 69평 복층 아파트가 꽉 찼어요. 아내가 당신 죽으면 이거 어떻게 버릴 거냐고 해서 아깝고 방법을 찾다가 가게를 냈지요. 카메라가 원래 600개 있었는데 10년 동안 500개 정도 처분했어요. 이제 100개 정도 남았지요."

50년에서 100년 전 물건들이 주를 이루고, 가장 오래된 물건은 며칠 전에 들어온 125년 된 독일제 발로 밟아 쓰는 발재봉틀이다. 작동 이상이 생겨서 현재는 수리 중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드라이버, 기름, 천들을 갖추고 있을 정도로 웬만한 건 스스로 손 보고 안 되면 수리기사에게 맡겨서라도 고치는 것이 철칙이다. 물건들에서 매일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며 정성을 쏟고 있는 게 느껴졌다.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루는 아들 준다고 타자기 사간 사람이 냄새난다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기름칠하는 게 냄새가 났던 모양이야. 이것도 세월이 얼만데, 사실 고물냄새가 나기도 하지. 근데 기계의 고물냄새가 사람 몸에서 나는 체취랑 같은 거예요. 애정을 가지고 기름을 치고 닦으면 역겹지 않아요."

방아쇠를 당겨야 찍히는 기관총 모양 `카메라'

구매한다는 건 물건의 역사가 오는 것

누구나 화려한 과거가 있듯 물건들에도 전성기는 있다. 하지만 좀 더 작고 간편한 기술을 입힌 물건들이 나오면서 이전의 물건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유진컬렉션의 물건들도 여러 이야기를 담고 흘러들어왔다. 아직도 진열장 한 귀퉁이에는 김 대표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앉아 있다. 1952년 고등학교 시절에 3,000환, 현재 가치로 따지면 3만 원 정도의 돈을 주고 샀던 브라우니 호크 아이 박스카메라(Brownie Hawk Eye 1949, 미국)다. 가장 처음 찍었던 사진은 검은 교복에 머리를 빡빡 민 학생 사진인데, 아직도 집에 있어 그 시절을 곱씹을 수 있단다. 지금 진열장에 있는 건 청파동 하숙집에서 도둑맞아 훗날 산 것이지만 덕분에 지금까지 수집을 이어올 수 있었다고.

한창 카메라를 수집할 때는 전국을 돌면서 직접 사들였다. 그러다 보니 별것 아닌 물건도 사연을 담고 나면 얼마나 귀해지는지 모른다고 한다.

"공주에 사진관 노인을 만나러 갔는데,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 사진관에 사환으로 들어간 얘기를 해요. 일본 사람들 아래서 고생고생하면서 사진을 배웠는데 해방하면서 그 사진관을 물려받았대요. 지금은 공주에서 제대로 예식장 겸해서 3층 집으로 해서 잘 삽디다. 그때 고생했던 사진기를 나한테 줬는데, 그 양반 젊었을 때 애환이 다 들어있는 카메라지 그게."

한 사람이 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이 오는 것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여기에서 '사람'을 '물건'으로 바꿔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물건도 거쳐 간 사람과 사연을 품고 떠돌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것처럼 켜켜이 쌓인 추억의 겹이 물건들 사이에 숨 쉬고 있어, 들춰보는 재미에 푹 빠져버리기에 십상이다.

"70년대에는 이 타자기로 사무실 비서들, 공무원들이 공문을 썼죠. 여상에서는 주판하고 이거 타자를 칠 줄 알아야 은행에 취직됐으니 타자학원이 있을 정도였지. 지금은 토익이니 뭐니 어떨지 몰라도 그땐 타자, 주판이 최고의 스펙이었다고."

이 외에도 미국에서 쓰던 1910년형 벽걸이 자석식 전화기(일명 모시모시 전화기)는 수화기를 들고 핸들을 돌리면 교환이 전화를 받아 연결해주던 시절의 사연을 담고 있고, 1925년에 나온 라이카 카메라는 1930년 일제강점기 당시 종로에 어지간한 기와집보다 두 배 비싼 665원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 종군기자들이 비행기 위에서 카메라를 떨어뜨렸는데 몇십 년 뒤에 땅을 파보니 다른 카메라는 썩었고, 라이카는 생생히 살아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바깥에서 기웃거리던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미지

① 1903년에 제작된 빅터 토킹 머신사 (Victor Talking Machine Co.)의 빅터5 나팔 축음기와 레밍턴
    타자기
② 대표가 자필로 쓴 '가게소개서'. 물건을 대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③ 100여개 남은 필름 카메라들. 거쳐 온 주인들과 세월만큼 사연도 많다
④ 들여온 지 얼마 안 된 새 식구 125년 된 쾰러 재봉틀. 대표가 재봉질을 하며 손수 수리중 이다
⑤ 1910년형 벽걸이 자석식 전화기. 교환을 통해야만 통화가 가능했다

물건과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의리'

릴 데크 녹음기를 찾는 손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몇 가지 물건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베이지색 기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두 개의 휠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1970년대 MBC 프로그램에 나온 노래를 녹음한 것인데 아직도 깨끗한 음색을 자랑한다. 손님은 결혼할 때 녹음한 테이프를 재생하기 위해서 릴 데크를 찾고 있다고 했다. 구하기 힘들다는 테이프와 기계를 보던 손님은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빈말처럼 들릴 법한데도 김 대표는 그 물건을 한쪽에 슬며시 빼놓는다.

"난 손님과 구두 언약을 하면 그대로 믿어요. 예전에 회사 다니던 시절에 마음에 둬놓은 라디오 보러 충무로 '기쁜소리사'에 가서 흥정하고 저녁에 사러 오겠다고 했는데, 일 끝나서 갔더니 고새 팔아버린 거야. 얼마나 아쉬운지. 그때 생각하면 그 마음 알기 때문에 안 팔고 있어요. 저 보라색 턴테이블은 3년째 못 팔고 있어요. 할머니가 산다고 하고 가셨는데,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네. 걱정돼."

이렇게 해서 남는 게 있느냐는 질문에, 장사로는 재미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재테크나 재산증식으로 모았다면 지금까지 올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물건과 사람의 인연을 중시하는 김 대표는 이 물건을 모두 팔고 난 후에 세상을 떠났으면 한다. 만약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가치를 모르는 자녀들에게 주기보다는 물건들을 아끼고 소중히 할 사람을 찾아 가게를 넘겨주고 싶단다. 물건과 사람 모두를 감동하게 하는 '의리'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젊은 분들이 이것저것 욕심을 내면 난 말려요. 한 번에 사면 싫증이 난다고 말리지요. 옛날에 소설 전집 사서 다 못 읽는 거랑 마찬가지예요. 한 권 한 권 사서 보는 게 재미가 있는 거랑 똑같아요."

"나는 80년 된 앤틱인데 사려는 사람도 없고 돈 주려는 사람도 없어요.(웃음)"라고 말하는 김 대표의 얼굴에서는 이 물건들과 함께해온 세월이 묻어 있다. 그의 손을 거쳐 제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110년 된 나팔축음기도, 이대로 잘 보존하면 100년 뒤에도 소리를 내고 돌아갈 것만 같다. 돌보는 정성과 시간만큼 우리의 인생도, 기계의 수명도 비례해서 늘어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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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은 서울시설공단(http://sisul.or.kr)에서 발행하는 지하도상가 매거진 G:HA[지:하]를 편집한 것으로 매거진 전체보기::링크새창베네핏 매거진(http://www.benefit.is/)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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