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파는 도서관 관장님?

시민기자 이나미

발행일 2014.05.01. 00:00

수정일 2014.05.01. 00:00

조회 2,387

[서울톡톡] 한 남자가 있었다. 부득이하게 대학 진학은 못했지만, 대신 무작정 책을 많이 읽었다. 그에게 책은 열등감과 오기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는 책으로 마을과 시장을 잇는 문화메신저가 됐다. 20여 년간 생선가게를 운영해 온 그는 몇 년 전부터 '도서관 관장'이란 삶이 추가되었다. 수유 재래시장 내 수산물 가게 사장이자 '수유마을 작은도서관' 관장인 이재권 씨(52). 그를 만나 전통시장에 도서관이 만들어진 배경, 나아가 시장에 도서관이 필요한 이유를 들어보았다.

4호선 미아역 8번 출구에서 나와 직진하면 수유 재래시장을 만날 수 있다

시장 안에 도서관 한 번 만들어볼까?

시장 안에서 책을 좋아하던 상인들끼리 책을 돌려보던 이재권 씨는 이들과 문득 '도서관을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도서관과 책에 대한 애정이 많았던 그 역시 오래전부터 가까운 곳에 작은도서관을 세우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가게를 운영하기에도 하루가 모자르기에 그저 짝사랑에만 머물렀다.

그러다, 우연히 나온 이 제안은 그의 짝사랑에 불이 지폈다. 바로 실행에 옮겨 도서관 운영팀을 꾸렸다. 도서관 운영방법도 모르고 경험도 없지만, 오로지 책에 대한 열정 하나만 믿고 진행했다. 도서관 등록부터 사전조사, 리모델링까지 소요된 준비기간만 총 6개월. 그렇게 상인회 사무실 2층 창고는 2010년 12월 '수유마을 작은도서관'으로 변신하였다.

수유시장 안에 위치한 수유마을 작은도서관. 상인회 건물 2층에 위치해 있다

"순천 기적의 도서관 같이 작은도서관 들을 위주로 견학하며 사전조사를 열심히 했어요. 상인들이 공간에 페인트칠도 함께 해주고, 책도 기증해주시고... 도서관 만드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이재권 씨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틈나는 대로 도서관을 지키며 직접 대출 작업도 하고 있다.

상인들의 꿈을 키우는 공간이자 시민들과 소통하는 공간

수유마을 작은도서관 관장이자 수산물가게 사장인 이재권 씨

지금은 시장 내 지역민과 상인들의 '사랑방'이지만, 처음부터 반응이 좋았던 건 아니었다. 심지어 '대형마트 진입으로 시장 입지가 약해져 열심히 장사를 해도 모자를 판에, 시장에서 책을 들고 다니는 건 보기 안 좋다'는 우려 섞인 반응도 나왔다. 그렇다고 이재권 씨는 낙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도서관의 영향은 하루아침에 생기기보단, 오랜 시간 꾸준한 인식이 있어야지 차근차근 바뀐다는 걸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주변 반응에 일희일비하기 보단 도서관이 시장에 필요한 역할이 무엇인지에 더 집중했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책들을 마련하는데 주력했다.

"시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임을 넘어 사람끼리 교감하는 인간적인 맛에 있죠. 이 도서관은 '상인의 꿈을 키우는', '책을 통해 상인과 시민이 소통하는 따뜻한 공간'을 지향합니다. 나아가 전통시장 침체기에 상인들은 스스로 시장의 미래와 경쟁력을 준비하고, 시민들은 세상의 흐름과 호흡하는 공간입니다."

수유시장 안 수유마을 작은도서관은 상인과 시민들이 책을 통해 교류하는 공간이다

이처럼 그는 지역주민과 상인들이 교류하면서 시장에 대한 애착은 물론, 시장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는 참여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상인들끼리 돌아가며 책을 선정해 함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인 '독서동아리'를 시작으로, 이제는 상인들은 물론 주민들이 더 많이 참여하는 '민화 수업'과 '물리치료', '인문학 강연'들이 그 예다. 이재권 씨는 이중 가장 보람을 느꼈던 건 인문학 강연으로, 올해는 동양철학에 관한 강연을 계획중이라 전했다.

"사실 작년에 서양철학 강연 12회를 기획하면서, 과연 사람들이 인문학 강연을 듣고자 많이 찾을지 고민했어요. 예상과 달리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고 굉장히 반응이 좋았어요. 특히 사람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발견한 계기였죠. 상인들은 장사를 하며 각박하게 살아도 속으로는 사람본질에 관해 깊이 고민을 해왔음을 알았습니다."

이 도서관에 비치된 책은 총 4,000여 권. 처음엔 기증 책들을 위주로 꾸렸으나, 작년부터는 좋은 책들로 채우고자 상인들에게 기부 받은 월 40만 원과 자비를 더해 신간들을 구입하고 있다. 구청에서 매년 200만 원을 받는 게 유일한 보조금이지만, 급한 땐 자비를 쓰는 횟수가 많은 정도로 운영 예산은 빠듯한 편이다.

도서관에는 분야별로 총 4,000여 권이 책이 비치되어 있다

그나마 공간 임대료는 나가지 않아 다행이라는 그는 내부 자생력에 대한 소신을 내비쳤다.

"도서관 운영은 내부 공동체가 같이 해야 됩니다. 만약 구청이나 시에 보조금을 받고자 전적으로 의존할 경우 갑자기 지원이 끊어질 때, 한계에 직면하기 됩니다. 그보단 자체적으로 마을구성원이 돌아가면서 운영하는 과정이 도서관이 영구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시장 안에 작은도서관이 있는 이유?

이재권 씨는 과거와 달리 현재 상인들은 문화와 교육혜택을 받아온 사람들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시장 안 도서관은 생활영역에서 문화혜택을 이어가는 공간임을 내세웠다.

그는 "시장에도 세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이어주는 연장선이 도서관 같은 문화시설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장 곳곳에 이런 문화시설들이 많아져야 시장을 찾는 시민들도 많아지는 건 물론, 시장에서 생활과 문화가 단절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문화를 누리지 못한 고픔이 더 큽니다. 이런 문화가 충족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삶이라 봅니다"라고 설명했다.

도서관 개관 후 상인들이 짬을 내서 책을 보고 나눠읽는 과정이 이 시장만의 진풍경이다

이제 그의 다음 목표는 '어린이 도서관'을 만드는 것. 시장에서 상인 자녀들을 포함해 지역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는 아쉬움에서다. 시장 안에 적합한 공간을 물색 중이지만 이 작은도서관을 만들기 전처럼, 아직까진 가슴 속에만 간직한 꿈이다.

'수유마을 작은도서관'은 자유로웠다. 공간에서 방문자들이 떠들거나 시장 음식을 가져와 먹는 것도 제재하지 않는다. 그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건 상인과 지역민이 아닌 방문자들도 책을 빌릴 수 있다는 것. 그러다 보니 간혹 책을 분실하는 경우도 종종 겪는다. 이에 이재권 씨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사람 손이 안간 책들이 많아 방문자들이 책에 관심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마음뿐이죠. 뭐 먼지 쌓이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수유마을 작은도서관은 책을 통해 이웃과 이웃이 만나는 따뜻한 공간임을 지향하고 있다.


■ 수유마을 작은도서관(cafe.naver.com/suyulibrary)
위치 : 서울시 강북구 수유 1동 50-77 2층
문의 : 02-988-0304
이용시간 : 월~토 오전 10시~저녁 6시까지. 일요일은 휴관
찾아가는 길
1. 4호선 미아역 8번 출구 나온 뒤, 8분 정도 직진하면 왼편에 수유재래시장 1번 게이트로 나옴. 시장통으로 들어와 재래시장 삼거리에 위치
2. 버스 간선 1114, 지선 101,102,106,107 등을 타고 성신여대운정캠퍼스(수유시장 정류장)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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