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갓길 노란 조끼가 있어 안심!

이은혜

발행일 2013.12.30. 00:00

수정일 2013.12.30. 00:00

조회 2,296

여성 안심귀가 스카우트 발대식

서울형 기초보장제도, 인생이모작지원센터, 올빼미버스 등 시민 말씀대로 탄생한 10가지 정책을 직접 경험한 체험담, 영상, 그리고 웹툰을 공모하는 <제7회 서울사랑공모전>이 지난 10월에 있었다. 서울톡톡에서는 그 중 이야기부문에 선정된 13편을 한 편씩 소개한다.

[서울톡톡] 철없던 대학시절, 술 한 잔 곁들인 밤샘작업이 대학시절의 진정한 낭만이라며 막차시간 간당간당할 때까지 대학로 근처를 배회 했었다. 대학교 3학년이었을 그 당시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잡히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 섬뜩하기도 했지만, '뭐 별일 있겠어' 하며 밤이 늦도록 친구들과 젊은 열정을 꽃피웠었다. 비가 무참히 쏟아졌던 그날도 프레젠테이션 발표 작업을 마무리하며 막차시간에 간신히 몸을 싣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유영철은 비오는 날, 치마 입은 여자만 쫓아다닌다는 소문이 생각났다. 순간 내 차림을 보니 나는 팔랑이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내 걸음걸이로는 약 15분. 당시 우리 동네는 은평뉴타운 개발 전이라 낙후되고 골목이 매우 어두컴컴했다. 폭우 속에서 적막이 느껴지는 그 골목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얼굴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큰 우산을 푹 눌러쓰고 걷다가 행인을 그만 치고 말았다.

"어이, 아가씨 사람을 쳐놓고 그냥가면 안돼지. 어? 그냥 가면 안돼지!"

술 취한 것 같은 사람이 매서운 소리를 질러댔고, 난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우산을 집어던지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뛰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보니 아빠였다. '우리 딸 언제 올까 기다렸지' 하시는 아빠 말씀이 따뜻한 빗물을 타고 귓가로 흘러내렸다. 그때는 너무나 놀라고 무서웠지만 시간이 흐르니 그날 빗속을 정신없이 뛰어갔던 나를 생각하면 멋쩍어졌고, 친구들은 곱게 자란 티낸다며 오히려 놀림거리로 삼았다.

그러던 중 얼마 뒤, 부모님과 함께 주말 점심밥상에서 뉴스 속보를 듣다가 우리 세 사람은 모두 경악했다.

'유영철 검거. 시신은 연대뒷산과 서강대 뒷산에 유기.'
"연대 뒷산이면 우리가 주말마다 놀러가는 수연이네 뒷길 아니냐?"
"세상에. 이 근방에다가 시체를 묻은 거야?"
"...잡...혔으니 천만 다행이네요..."

믿을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수많은 범죄 속에서 나는 아무런 일을 당하지 않았단 사실이 감사하면서도 말 그대로 흉흉한 도시생활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날 이후부터 이사 가기 전까지 아빠는 하나뿐인 딸을 위해 버스정거장까지 마중 나오셨다.

시간이 흘러 나는 결혼을 했고, 전세난 속에 간신히 구한 아담한 빌라에 새둥지를 텄다. 깨끗하고 너무 예쁜 우리 집에 단 하나 단점이 있다면, 빌라촌이라 아파트와 달리 한적하여 골목골목이 어둡다는 것이다. 그래도 서로 바쁜 일상 탓에 밤늦은 귀갓길에도 남편한테 차마 마중 나와 달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심장이 들썩이는 야심한 시각의 귀갓길은 아빠생각이 날 수밖에 없게 했다. 부모사랑과 남편사랑은 확실히 다른 것일까. 결혼생활을 하면 할수록 부모님과의 추억들이 하나둘씩 스쳐지나갔고, 나는 이렇게 내리사랑의 말뜻을 체감하며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어느 날 퇴근길에 '여성 안심귀가 스카우트'란 조끼를 입으신 두 여성이 한 여성과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가는 방향이 같기에 나도 얼결에 뒤따라가면서 용기 내어 물어봤다.

"죄송한데요, 여쭤볼게 있어서. 이거 어떻게 신청하는 거에요? 어디까지 동행해주시나요? 얼마..에요?"

웃으며 건네준 명함을 받았고 생각보다 간단하단 것도, 또 무엇보다 무료란 사실도 알게 됐다.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항시 명함을 준비하고 다니신다 하셨다.

여성들이 귀가하기에 너무 위험하다는 말을 대놓고 해도 곱게 자란 투정으로 여겨지는 세상이 더는 아니었다. 지나가는 행인의 구두소리에 귀를 쫑긋, 핸드백을 움찔 움켜쥐는 밤길위에, 안심귀가 서비스는 눈에 확 꽂힐 수밖에. 3일쯤 뒤, 받아든 명함에 적힌 방법대로 서대문 자치구에 전화를 걸어 귀가서비스를 신청했다.

"저..안심귀가 서비스 신청을..."
"도착하시는 지하철이나 정류장명을 말씀해주세요."

30분 쯤 뒤 북가좌 삼거리 정류장엔 푸근한 아줌마 두 분이 노란조끼를 입고 나를 반겨주셨고, 간단히 신분증을 보여드린 뒤 우리는 동행을 시작했다. 적막이 멋쩍어 이런 저런 사는 얘기를 먼저 건냈고 밤길은 나즈막한 웃음꽃을 피웠다. 다들 한 가정의 아내이고, 엄마이고. 딸 생각, 조카 생각 나셔서 이 일이 더 의미 있으시다고.

무서웠던 밤골목이 여유로웠다. 다시 보니 가로등의 노란 불빛도 살아있었고, 구름을 거느린 달도 희미하지만 새초롬히 떠있었다. 낯선 두 분과 동네 아주머니처럼 친근하게 두런두런 사는 얘기 풀다보니 밤공기가 청명하니 상쾌하고 좋았다.

"아! 밤공기가 참 좋네요. 가을 냄새가 나요."
"그러게요. 가을이죠 이제 완전한 가을..."
"내일 예보에 비 소식 없었는데 달무리가 졌네요. 혹시 모르니 우산 챙겨가요. 거기 계단 조심하시고..."
집으로 들어서서 창밖을 향해 안심귀가 했다는 사인을 힘차게 보내드렸다.

다음날 휴대폰으로 안심귀가 스카우트의 명함 사진을 찍어 자취하는 친구들에게 보내주었다. 남편은 어디 두고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냐며 놀려대는 친구들에게, 피곤해 지친 남편보다 백 배, 천 배 든든하다며 짤막한 후기도 곁들여 주었다. 몇 번 이용해본 친구들은 서울시가 진정 여성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둥 호들갑을 떨기도 했고, 사내 게시판에 올려 팀장의 칭찬을 받기도 했단 소식을 알려왔다. 야근하는 날이면 남편에게 "여보! 나 안심귀가 할게. 걱정 말고 자고 있어!" 메시지를 날려주었다.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부쩍 나를 둘러싼 주변에 관심이 생긴 탓인지, 눈에 띄게 여성 택시 운전기사들도 많이 보였고, 동네 순찰차가 몇 분씩 대기하다 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루에도 수많은 교통사고와 범죄로 사람들이 죽어간다. 한 때는 나와 매우 먼 일들이라 여겼지만, 점점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있단 것에 감사할 때가 많다. 또 내가 작은 일상의 여유를 누릴 수 있음은 이렇듯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배려로 가능하단 사실에 마음이 녹아진다. 얼핏 보면 각박한 세상이지만, 그 속에 훈훈하고 따뜻한 사람을 향해 일하는 손길을 통해 숨 쉴 곳을 찾고 나는 오늘 하루도 힘차게 내일을 준비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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