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세 평창동 공주 할머니의 달맞이 소원

하이서울뉴스 조미현

발행일 2011.09.07. 00:00

수정일 2011.09.07. 00:00

조회 6,829

 

며칠 전 102세의 삶을 조용히 즐기고 계신 최영손 할머니댁에 다녀왔다. 2년 전 102세의 연세로 건강하게 살다가 임종하신 할아버지까지 3대가 같은 공간에서 따로 또 같이 독립적으로 생활해왔다. 서울에 다 모여 사는 할머니의 자식 여섯 중 맏딸은 80세이며 막내아들은 60대 중반이지만 이 집에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어린' 나이다. 나이란 정말 보기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숫자란 생각이 들었다. 젊어서부터 늙을 때를 준비해야 한다. 누구나 100세를 목표로 하여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인생은 길 수 있다. 돌아오는 추석, 둥근 달을 보며 빌어볼 소원이 내게도 생겼다.

텔레비전 전기가 나갔나? 아니요, 어머니! 안경이 더러운 거죠.

마을버스를 타고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하는 종로구 평창동 최영손 할머니댁 거실에 당도했을 때다. 옆자리에 앉자마자 어제도 그제도 봤던 허물 없는 사이마냥 할머니가 자기 얘기를 꺼내신다. "어제 깜짝 놀랬어. 저녁을 먹고 나서 텔레비전을 보려니까 화면이 하나도 안 보여요. 전기가 잘못 됐나? 아닌데...내 눈이 아주 갔구나. 아후~ 큰일 났구나. 이제는 잘 듣지도 못허고 잘 보지도 못허고 반편이야, 반편..."

1910년생인 최영손 할머니는 우리 나이로 치면 올해로 102살이다. 그러니 시력이 좋으실 리 없건만 같이 사는 아들 김관형(71)씨는 탁자 너머에서 "안경을 닦아 볼게. 안경이 더러워져 있어요"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지금도 바느질을 하시는 양반인데 최근에는 눈도 그렇고 귀도 어두워지셨다며 부러 목소리 볼륨을 한껏 높인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안경 쓴 사람이 할아버지, 그 왼쪽 뒤가 최영손 할머니

11살이면 시집을 가야 할 나이인데...학교가 그리도 가고 싶더라

할머니의 기억은 11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영손 할머니는 지금의 개성인 송도에서 태어난, 아무한테나 안 준다는 셋째 딸이었다. 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한 12살 소녀들은 당연히 시집을 가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대신 학교를 택했다. "내가 아버지한테 이런 말 하지도 않을 사람인데, 아버지 한 번만 봐주세요, 나를 이번에 학교만 보내주시면은 내가 학교 문턱 닿고 내일이라도 시집 가라고 하면 가겠으니 하여튼지 입학만 시켜달라고 소원을 했어요."

왜 그렇게 학교가 좋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국민학교도 조금 일찍 들어갔다. 동네 언니가 맨날 학교 얘기를 하기에 4월 신학기가 시작하기를 미처 못 기다리고 교장 선생님께 사정해서 음력 정월에 교실에 들어갔는데 덜덜 떨면서도 마냥 좋았다고 한다. 평범한 조선 사람인 아버지도 결국 관습을 뛰어넘는 셋째딸의 고집에 백기를 들어주셨다. 할머니가 곰곰이 생각해본 이유는 이렇다. "위로 시집 간 두 딸들이 재미가 없으니까 나를 내버려두신 거지."

큰 언니의 남편은 결혼하자마자 비행기도 없고 기차도 없던 시절에 불란서로 가더니 소식도 없었고, 태중에 아이를 품은 채로 야학을 다녔던 언니는 결국 배가 너무 불러와 중도에 하차하고 말았다. 둘째 언니만 야학을 졸업하고 여세를 몰아 국민학교 4학년으로 들어갔지만 장질부사가 돌아 일주일 앓다가 저세상으로 떠났다. "둘째 언니는 성질이 아주 부지런해서 그렇게 공부를 잘 했어요." 때는 바야흐로 '3.1운동이 일어나고 세상이 어지럽던' 시기였다.

단 한 번의 신식 데이트 그리고 신식 결혼식

최영손 할머니는 그렇게 해서 당시 미국 선교사가 개성에 세운 '호수돈' 학교에 입학했다. 지금은 대전으로 옮겨와 유지되고 있는 이 학교는 박마리아, 모윤숙 등 당대 신여성들을 배출해낸 명문이었다. 하지만 향학열을 계속 불태우지는 못했다. "내가 10회 졸업생인데 학교를 가서는 빨리 졸업을 했죠. 그 다음으로는 이화전문학교도 있고 피아노과도 있는데...더는 공부하겠다고 아버지한테 말을 못 해. 약속은 약속이니 나도 시집을 가야겄는데 시집 갈 데가 있어야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할머니가 국민학교 졸업할 무렵 벌써 청혼이 들어왔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학교를 가겠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그집에서는 다른 곳과 혼인을 시켰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여자가 죽은 뒤 남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의 와세다대 경제과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그리고 방학을 틈타 고향집에 왔는데 그때 양가 어른들이 다시 불을 붙였다. "어른들이 앉아서 그 집 딸 시집 갈 때가 됐는데 혼인 어때요, 하니까 어떤 젊은 남자가 방 안에서 듣고 있다가 그 사람이면 물어볼 것도 없어요, 그 집에서만 승낙을 하면은 당장이라도 결혼이 되는 거예요, 하는 거예요." 그 젊은이가 바로 훗날 할머니와 백년해로 한 주인공, 할아버지였다. 102세로 돌아가실 때가지 금슬 좋게 사셨다니 대단한 인연의 시작이다.

"나는 그 양반을 몰랐어요. 얼굴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고...그런데 그 양반은 뒤로다가 하나서부터 열까지 나에 대해 다 알고 있었어요." 역시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할아버지는 진작부터 할머니를 마음에 두고 할머니의 이종사촌인 쌍둥이 개구쟁이들을 꼬드겨서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받고 계셨던 것이다. 근대적인 연애랄까.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그 때 작은방에서 다림질을 하던 며느리 김경자(70)씨가 거든다. "아버님이 편지도 쓰셨대요." 아들 김관형씨가 막는다. "그 얘기를 왜 그렇게 길게..."

뿐만 아니다. 할아버지네는 중매 얘기가 다시 불거지기 이전에 새집을 짓는다며 할머니 친정 바로 옆으로 이사까지 왔다. "그집 2층에서 내려다보면은 우리집 큰마루거든. 그 젊은이가 날 쳐다보고 얘기를 시작하는 거야." 가슴이 콩닥거렸다고 실토는 하시면서도 할머니는 할 말은 하고야 마는 똘똘한 처자였다. 중매 얘기가 나오고 나서 그 젊은이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으니 말이다. "아니, 나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결혼을 해요?" 그랬더니 젊은이는 내일 당장 나오라고 했다. 요즘말로 데이트였다. "그래서 저녁밥을 먹고 일본 사람이 하는 큰 상점으로 나갔더니 누굴 시켜 나를 데리러 왔어요. 그리고 개성 역 앞에 철도공원이라고 거기 들어가서 얘기 좀 하고...그러고는 결혼 승낙이 되가지고는..." 자꾸만 불경스럽게도 큭큭 웃음이 나왔다. 아들과 며느리도 이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다. 물론 할머니는 개의치 않으셨고 언제까지고 이야기는 이어질 것 같았다.

나이 70이 넘어도 아직 며느리, 그게 늙지 않는 비결이다

이번 추석에는 처음으로 고향집의 방식을 따라 산소로 모인다. 개성에 있을 때는 선산에서 차례를 지내는 게 전통이었지만, 피난 내려오고 나서는 선산에 갈 도리가 없어 계속 집에서 모였었다. 그런데 2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처음으로 갈 산소가 생긴 것. 자손들이 다 모이면 30~40명이다. 할머니에게 증손주 이름은 외우시냐고 괜한 질문을 했다. "모르죠. 작년까지도 알았는데, 생일도 잊어버리고, 이름도 잊어버렸어. 우리 식구도 이제는 앞으로 봐야 알지 돌아서 보면 못 알아봐요." 에그그. 진짜 괜한 질문을 했다. 할머니의 간식 시간이다. 으깬 복숭아와 매실차와 가정식 약식이 차려진다.

며느리 김경자씨가 외출 채비를 하면서 그 침묵을 메운다. "어머니가 원래 얘기를 엄청 잘하세요. 2003년인가 아침마당이란 프로에 나갔을 때는 70분 중 한 50분은 우리 어머니가 다 하셨을 정도로...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조리 있던 말씀이 많이 삼천포로 빠지네요." 그런 말을 하는 아내를 지켜보는 김관형씨의 눈이 그윽하다. "저 사람이 일흔인데 아직도 며느리기 때문에 늙지를 못해요. (웃음) 그 비결이 있습니다. 억지로 당하는 게 아니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거죠. 어차피 당하는 일인데...자기 생각을 이렇게 보느냐 저렇게 보느냐의 차이뿐인데...그게 결국은 현명한 자기 보호라구, 일찍 늙지 않는 방법이죠."

그들 가족을 지켜보면서 할머니는 참 복이 많으신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집 자식들도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듣고 자라 몸에 자연스럽게 배는 게 가정교육이 아닌가. 하지만 김관형씨 생각은 조금 달랐다. "기대할 수는 없어요. 그거는 우리 세대에서 끝난다고 보고...이제는 사회 구조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어요." 부부 이심전심이다. "그렇죠. 옛날 사고 방식은 너희가 부모를 모셔라 그런 거였잖아요. 이제는 각자 자기 맘대로죠.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안 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102세 할머니의 달맞이 소원이 두 개

"참, 어머니 하모니카 어디 두셨어요? 우리 어머니가 하모니카 연주도 잘 하세요"라고 며느리가 얘기를 꺼낸다. 할머니가 보조기구를 의지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신다. 그리고 문갑에서 하모니카를 꺼내신다. 할머니의 가지런한 머리만큼이나 옷매무새만큼이나 방이 정갈하고 예쁘다.

할머니는 다시 거실 소파로 나오신다. 하모니카를 튜닝하시는 사이, 아들 내외는 복지관에서 포크댄스 강사로 지난 10년간 자원봉사활동을 하면서 찍었던 사진들을 꺼낸다. "이 때가 몇 년이지? 이건 MT 갔을 때고...아, 우리 하이서울페스티벌에도 나갔었어요. 2005년이던가? 서울광장 무대에서..." 그 무렵 일간지 신문기사에도 실렸다. 중간제목에 '노부부'라고 쓰여 있다. 무색했다. 내 옆에 있는 이들이 어떻게 70대란 말인가. "우리 큰 누님은 더 해요. 80세인데 미인에다 작년까지도 포크댄스를 췄죠." 집안 가풍이 되어가는 듯하다. 6남매 중 막내가 60대 중반인데 명함도 못 내민다고 하니. "우리집은 자연스럽게 100살이 기준이 돼버렸어요. 식구들이 은연중에 다 인생설계를 100살을 기준으로 놓고 하고 있다니까."

할머니의 하모니카 연주가 우리 대화의 배경음악이 되어주고 있었다. '노들강변'을 지나 '황성옛터'로 이어진다. 같은 노래가 되돌이표가 있는 듯 서너번 반복된다. 그런데 신기하다. 노래가 슬프지 않다. 할머니는 일제가 합병하던 그 해에 태어나셨으니 한 많은 한국 근현대사를 지나오신 분인데, 연주가 탱탱하고 똘똘하다. 당당하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거리를 걸어가는 신여성의 모습이 겹쳐진다. 할머니의 힘이랄까.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이번 추석에 달을 보며 무슨 소원을 비실 거냐고.  

Q: 달을 보고 소원을 비신 적이 있으세요?
A: 평생 그런 적 없어요.
Q: 한번 생각해보세요.
A: 음...첫째 소원이 앓지 말고 자다가 가는 것. 여러 형제들이 나 없어도 의합해가지고 잘 사는 게 둘째 소원이고...
Q: 셋째 소원도 있으세요?
A: 하아~(돋보기 안경 너머로 할머니의 눈과 마주쳤다. 한동안 바라봤다.) 그저 건강하게 사는 게...잘 사는 건 부럽지 않아. 건강하게들만 살면 좋겠어.
Q: 할머니처럼요?
A: 나처럼?
Q: 네, 할머니처럼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A: 오래오래? 아니에요. 건강하게만 살면 좋겠어. 텔레비전 보면 어린애들이 세상에...나는 침대에 어린아이들 뉘여 놓고 그런 거 안 보고 가는 게 다행이죠. 그리고 수술하는 거 안 보고.
Q: 자손들 중에 한 명도 없으셨다구요?
A: 제일 고마운 거예요. 하느님한테 고맙고, 부처님한테 고맙고...

 

최영손 할머니의 무병장수 비법

① 소식(小食)과 가정식, '입에 맞는 것이 위에도 좋지는 않다!'
할머니는 셋째를 임신했을 때 늑막염에 걸렸던 때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병원 신세를 지신 적이 없다. 비결을 여쭸다. "좌우지간에 입에 맞는 거가 위에도 좋지는 않거든요. 내가 어려서부터 바나나를 참 좋아했는데 지금은 입에 넣지 않아요. 음식도 배불러 소리 나도록 안 먹어요." 할머니의 말씀에 이어 며느리 김경자씨가 귀뜸한다. "어머니는 삼시세끼 뜨거운 국과 밥을 챙겨드세요." 아들 김관형씨도  덧붙인다. "우리집은 외식을 안 해요. 뭐든지 해먹죠. 동네 슈퍼에서 우리 집이 가장 많이 사는 집이라고 할 정도예요. 밖에 나가도 집에서 먹는 거보다 맛있는 게 없더라구요." 매일 챙겨드시는 홍삼도 일조했을 거라면서.

②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
아침 5시 30분~6시 기상. 아침식사 8시 30분~9시. 점심식사 12시. 저녁식사 5시. 그리고 10시 30분이 되면 어김없이 주무신다. 할머니 표현에 의하면 "(밥을) 물어보지도 않고 갖다 주도록 하는 거야.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고..." 식이다. 맨손으로 하는 운동도 중요하다. "사지를, 두 다리하고 팔을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해요. 자고 깨서 누운 채로도 하고 저녁에도 그러고..." 할머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허리 아픈 걸 모르고 사셨다고 한다. 남들이 흔히들 어깨를 주물러주는데 어깨 아픈 것도 몰랐다고.

③ 소일거리 또는 취미생활, 웬만하면 내 손으로!
할머니는 매일 바느질을 하신다. 이불도 뜯어서 다시 꼬매시고, 옷장을 정리하면서 보이는 천들을 가지고 이것저것 만들어내신다. "지금 입고 계신 옷도 어머니가 만드신 거예요. 이 바지..." 김관형씨가 가리키는 회색 바지가 아주 곱다. 며느리가 시집 올 때 해온 치마저고리가 이뻐서 얼마 전에 고치신 거란다. 할머니는 방 청소도 혼자 하시고, 긴 머리도 아침마다 손수 곱게 빗어 올리신다. "국민 학교 때 점심시간이 되면 반 아이들이 모두 머리를 다 풀고 달려들어. 나한테 해달라고. 머리를 따고 교복 입고 줄 서서 거리에 나가면 한 볼거리가 됐지." 실삔을 촘촘하게 꽂으신 솜씨가 일품이다. 할머니는 하모니카 연주도 잘하신다. '평창동 공주 할머니'로 '스타킹'이란 프로에도 출현해 실력을 뽐내셨다고 한다. 불경 공부도 일과 중 하나다. 요즘 들어 살생에 대해 많이 생각하신다. 젊은 시절 외아들인 할머니의 남편에게 수 없이 닭요리를 주문하셨던 시아버지 때문에 피 흘렸던 닭들이 떠오르신다는 할머니는 요즘 피 흘리는 것은 되도록 안 드시려고 한다고. 이렇게 하시다 보면 하루가 간다.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시간이 빨라. 아후~"

④ 그리고...가족
"아들딸들이 고맙죠. 특히 저 사람이 효자여요"라면서 할머니는 아들 김관형씨를 가리킨다. 이 집에는 3대가 같이 산다. 할머니, 김관형씨 내외 그리고 결혼한 손주 내외. 하지만 층도 다르게 쓰고, 각자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김경자씨는 "다 나가는 사람들이니까 참견을 안 해요. 아침저녁 못 볼 때도 많구요." 김관형씨 부부도 일주일에 4일은 오후에 노인복지관에 나가서 포크댄스를 가르치며 봉사를 한다. 각자가 자기 할 일을 하고 즐거워야 한다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게 현명한 비법인 듯. 

#추석 #한가위 #평창동공주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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