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같은 인생 2막
서울톡톡 김은미
발행일 2013.06.04. 00:00
[서울톡톡] 인생은 '우연'과 '운명'이 만들어내는 합작품이라 하지만, 때론 '우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만들며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펼쳐내기도 한다. 우연히 잡은 카메라, 그리고 다큐멘터리 촬영감독에서 홍보담당 공무원이 되기까지, 그 주인공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예전에 <다큐 인생 2막>이란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그에게 이보다 어울리는 제목이 또 있을까. EBN 인터넷 방송국 PD 유영희 주무관의 다큐 같은 '인생 2막'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은평구청을 찾았다.
제1막, 30살에 만난 카메라
은평구청 3층에 위치한 EBN 인터넷 방송국으로 오면 된다는 그의 말에 3층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학교 방송실마냥 작은 방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구민이 감동하는 방송, 구민과 함께하는 희망제작소'라는 타이틀 아래, 그럴듯한 방송국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스튜디오, 영상편집기, 음향기기 등 방송장비로 가득한 그 곳에서 유영희 주문관을 만났다. 유 주무관을 비롯한 다른 방송국 직원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장소를 1층 카페로 옮겨 인터뷰를 진행했다.
"카페가 이야기하기 편할 듯해서요. 저 수다 떨기를 좋아해요. 제 이야기가 기삿거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수다 떨다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요.(웃음)"
그의 한 마디에 미리 준비한 인터뷰 질문지를 덮고 자연스럽게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기로 했다.
"서른 살까지는 1년 이상 진득하게 한 일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직업군을 전전했어요. 정말 내가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어느 날, 우연찮게 카메라를 만지게 되었는데, 내가 이 일은 끝까지 할 수 있겠다 생각했죠."
그렇게 그는 지방케이블 TV에서 뉴스 촬영을 시작했다. 우연히 손에 쥔 카메라와 함께 촬영감독이라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케이블 TV에서 일을 너무 무리하게 했어요. 몸이 아프기 시작했죠. 결국 일을 관두고 잠시 쉬고 있는데 우연히 박정숙 감독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저 새로 산 MP3 할부금을 갚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박 감독님과 일을 하면서 많은 걸 배우게 되었지요."
MP3 할부금을 갚기 위해 무작정 박정숙 감독님과 독립 다큐멘터리 촬영 일을 시작하게 된 유 주무관은 카메라 앵글을 통해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독립 다큐멘터리는 다양한 시선과 작은 소리를 담아내는 일입니다. 소외계층, 노동자, 여성문제 등 살면서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죠."
독립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표현하는 방식이 뉴스와 전혀 달랐다. 사실뿐만 아니라 이를 이야기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삶까지 담아내는 것이 바로 독립 다큐멘터리였다. 다큐멘터리와의 인연은 그렇게 우연히 시작되었지만 마치 운명처럼 그는 다큐멘터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가 말한 다양한 시선과 작은 목소리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촬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무엇인지 물었다.
"<동백아가씨>(2008)란 작품이에요. 소록도에 거주하는 한센인의 일상을 담은 이야기로 한센병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주는 영화입니다.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좋은 영화로 선정되기도 했고 당시 영화관에서 상영되기도 했어요. 독립 영화, 그것도 다큐멘터리가 상영관을 잡는다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그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에요."
그러나 <동백아가씨>는 한센인 주인공의 자식들이 영화 개봉을 완강히 반대하여 결국 많은 관객들과 만남을 갖지 못한 채 영화를 내리게 되었다.
"작품이 엎어지고 나서 촬영지 고흥에 가서 정말 목 놓아 펑펑 울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영화, 그것도 독립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산다는 건 고생과 가난을 자초하는 일이다. <동백아가씨>는 그에게 꽃 피우지 못한 꿈으로 남게 되었고 그의 다큐 인생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제2막, 은평구 EBN 인터넷 방송국
다큐멘터리 촬영 일을 그만두고 그는 2011년 5월부터 은평구청 홍보담당관으로 EBN 인터넷 방송국에서 일하게 된다.
"2011년에 제가 연애를 시작했거든요. 다큐 일을 계속 할 수가 없었어요.(웃음)"
그는 연애와 결혼으로 인해 공무원이 되었다고 쑥스러운 듯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가만히 얘기를 듣다보니 그에게 또 다른 꿈이 있었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은평구는 이야기가 많은 곳이에요. 그만큼 주민들과 할 수 있는 '거리'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중파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분명 지역 안에서 공유하면 즐거운 이야기, 지역민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담는 과정에 주민들이 직접 참여한다면 더욱 귀 기울여 듣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로 EBN의 역할이기도 하구요."
은평구 EBN 인터넷 방송국(www.ebn.seoul.kr) '주민방송단'의 처음 이름은 '주민참여방송체험단'이었다. 방송을 직접 '만들기'보다 '체험'하는 수준으로 UCC 제작에 참여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주민과 함께하는 방송을 만들기 위해 '주민방송체험단'을 '주민방송단'이라 이름을 바꾸고 마침 아나운서가 일을 관두면서 이 분야에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애로사항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전문 아나운서가 5~10분이면 끝내는 리딩은 2~3시간씩 걸리기도 했고 아예 단어별로 편집을 하여 방송을 내보낸 적도 있었다.
"지금은 방송단에 아마추어뿐만 아니라 프로들도 있습니다. 저희 방송국에 60년대 KBS에서 활동하신 이향숙 할머니 아나운서가 계세요. 이향숙 할머니(80)가 방송단 활동을 하며 옛날 전성기 모습을 되찾고 계시죠. 주민들이 방송을 통해 점점 변화된 모습을 확인할 때 가장 보람되고 뿌듯합니다."
지금 EBN 주민방송단은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리포터, 청소년뉴스체험(청소년직업체험) 등 주민참여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또한 전문방송교육을 함께 진행하며 말 그대로 주민이 함께하는 희망방송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유 주무관의 전화벨이 울렸다. 방송국에 손님이 오셨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방송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실제 주민들이 방송국을 찾아와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고 했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하는 곳이 방송국이니 당연 그럴 터. EBN 방송국은 주민들의 이야기가 가득한 '카페'였다.
"은평구 '주민들의 이야기' 힘으로 인터넷 방송국을 이끌어 갈 수 있었어요. 전문가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숨 쉬면서 만들어 나가는 인터넷 방송입니다. 언젠가는 은평구 주민들과 함께 단편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은평구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에너지를 통해 치유 받을 수 있는 힐링영화요. 다큐 촬영일을 할 때 집이 이태원이었는데 은평구로 이사를 했거든요. 아마 그 때부터 저는 은평구와 인연이 있었나 봐요."
그 인연이 필연이 되어 유 주무관의 다큐 인생이 이곳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삶'을 기록하는 것이 다큐라면, 자신이 발 붙이며 살고 있는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만들어가고 있는 그의 이야기 또한 다큐가 아닐까. 은평 EBN 방송국에서 펼쳐질 그의 다큐 인생 3막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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