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의 유쾌한 변신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김영옥

발행일 2011.12.21. 00:00

수정일 2011.12.21. 00:00

조회 3,607

 

한 땀 한 올 규방공예전(展) 연 유덕기 내과 원장... 배워서 남 주는 정신(배남정신) 돋보여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포스터 속의 남자는 전통규방공예의 하나인 사각 보자기를 만들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세모 천을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꿰매 네모난 문양을 만들고 그것들을 다시 연결해 사각의 보자기를 만들고 있는 남자의 손엔 골무도 끼워져 있다. 색색의 천과 실들이 놓여 있는 책상 위엔 규방공예 도구들을 담았음직한 예쁜 보관함이 반쯤 열려져 있고, 남자는 무척 진지하게 바느질에 몰입해 있었다. 다소곳하게 앉아 사각보를 만드는 인물이 아낙네가 아닌 남자라는, 약간은 이질적인 포스터 앞에 멈춰 섰다.

“아, 이 분은…….” 반가운 마음과 함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지난 12월 12일부터 16일까지 5일 동안 도봉구청 1층 한쪽에 마련된 오픈 갤러리에선 규방공예전이 열리고 있었다. 갤러리 미르(종로구 사간동 소재)와 함께 진행한 ‘유덕기의 한 땀 한 올 규방공예전’에는 갤러리 미르가 소장하고 있는 규방공예 유물들과 포스터 속 남자가 만든 각종 규방 공예품 3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낙네가 아닌 남정네가 만들었다는 규방공예품들 때문인지 관람객들은 전시 도우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전시품들을 보곤 했다. 바늘을 꽂아두는 바늘겨레와 주머니 오방낭, 핸드폰 고리들은 남자가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앙증맞았다. 다과보, 오방색보, 무지개보, 연잎보, 사선단보, 천연염색 천으로 만든 명주보 등 다양한 종류의 보자기들은 그 색 배합이며 간격이 비뚤지 않은 일정한 ‘땀’이 감탄스러웠다.

‘옛날엔 이렇게 만들어 썼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갤러리 미르의 규방공예 유물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무엇보다 포스터 속 남자가 만든 규방공예품들을 보며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품을 감상하면서 보게 된 전시장 한 쪽에 붙은 ‘전시회 수익금은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됩니다.’ 라는 문구는 '음, 역시!'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눈길과 발길을 사로잡은 포스터 속 남자는 도봉구 방학동에서 내과병원을 22년째 운영하고 있는 유덕기내과 병원장(56세)이었다. 이·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해 지역의 독거노인들에게 무료 이·미용봉사를 하는 의사로 소문이 자자했던, 수 년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평소 전통 공예를 좋아해서 전통장이나 집기류들을 사 모았다던 그는 인사동을 지나가다 규방공예품들을 보게 됐고, 배우고 싶은 마음에 수소문해 규방공예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남자가 무슨 …….”이라던 강사는 그의 바느질 솜씨를 보고 가능성 있다며 그의 배움의 열정을 높이 샀다. 2년 전부터 연습만 하다가 작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규방공예를 배우게 됐다. 평일엔 진료 때문에 시간이 나지 않으니 토요일 야간과 격주 일요일 오후 시간을 이용해 배우기 시작했고 틈틈이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일주일에 한두 개씩 만들어 약 30여 개의 작품이 탄생했다. 규방공예를 지역 주민들에게 알리고, 연말을 앞두고 판매 수익으로 이웃돕기도 할 겸 전시회를 열었다. 유물이 손상되거나 분실을 우려했던 미르 갤러리 측에서도 전시회를 여니 규방공예를 알리는 게기가 됐다며 매우 좋다는 반응을 보였고, 구청을 방문한 주민들 역시 귀한 볼거리들을 무척 반가워했다. “급한 성격도 차분해지고, 집중력이 커지는 것은 물론 치매 예방에도 좋고,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랍니다.” 규방공예의 매력에 푹 빠진 그의 예찬론이다.

2003년 다섯 번의 도전 끝에 국가기술자격면허증인 미용사자격증을 땄던 그는 지역의 독거노인들에게 무료 미용봉사를 했을 뿐 아니라, 복지관과 노인센터의 노인들, 서울역의 노숙자들에게도 무료 미용봉사를 했다. 노숙자들의 머리를 자르면서 미용 기술과는 다른 이발 기술이 필요함을 알게 됐고, 제대로 잘라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사비를 들여 2006년부터 틈틈이 이발학원을 다니며 이발 기술을 익혀, 이듬해 이용기술자격증도 땄다. 그렇게 딴 이·미용 기술로 그는 지금까지도 무료 이·미용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명함엔 의사 이외에 헤어 디자이너란 직업이 새겨져 있다.

매달 첫째 주 월요일에는 그를 포함한 5명의 이·미용 봉사팀과 도봉구 방학3동 자치센터에서 70세 이상 노인 30여 명의 머리를 무료로 잘라 주고 있다. 또한 매달 둘째 주 일요일에는 서울시의사회관에서 동료들과 함께 의료 봉사뿐 아니라 외국인근로자들의 머리도 잘라 주고 있다. 요청이 오면 수시로 무료 이·미용 봉사를 위해 나선다. 청진기와 가위를 양손에 든 의사, 멋지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6년 동안 도봉구의사회장을 맡으며 회원들과 매년 진행하던 송년모임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좋은 일을 하자는 취지로 망년회를 송년 음악회로 바꾸고 티켓 판매금과 성금을 모아 행사 비용을 제하고 불우 이웃을 돕는 기금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2005년 첫해 2백만 원을 시작으로 매년 3백여만 원의 성금을 도봉구청에 기탁해 오고 있다. 지난 12월 3일 ‘이웃과 함께 하는 도봉구 송년 음악회’를 열어 315만 원을 기부했다.

특히 그는 한미 참의료인상 봉사상 상금 3백만 원 전액을 성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진료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역주민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그의 생각은 서울시 봉사상 대상(2005년), MBC 봉사상 대상(2010년) 등 굵직한 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매번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그것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그의 행보는 주변을 따뜻하게 했다.

의사, 이·미용사, 규방공예 등 못 하는 게 뭐냐, 다재다능한 것 아니냐는 주변의 물음에 “재주가 많은 것이 아니라 남이 안하는 것에 집중하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어려운 것을 하고 나면 성취감이 남달라요.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재미 또한 무척 큽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서며 몇 년 후 어떤 이력으로 사람들에게 이색적인 감동을 줄지, 그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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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이미용사 #규방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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