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만 천 번 본 사나이의 독립선언

하이서울뉴스 조미현

발행일 2011.04.20. 00:00

수정일 2011.04.20. 00:00

조회 5,961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승범을 가르친 남자

김주상(38)이란 배우를 아시는가? 아니면 예명인 김호빈이란 이름은? 데뷔한 지 20년 넘은 중견 배우로 강동구립극단 소속 정식 단원이며, 지금까지 연극과 뮤지컬 48작품, 단편을 포함해 영화 9작품에 출연했고, 현재는 뮤지컬 <슈퍼스타> 공연을 앞두고 한창 연습 중이다. 그에겐 좀 남다른 프로필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직업 배우라는 것. 휠체어가 없이는 기동이 불가능한 뇌병변1급의 중증장애인이다. 그리고 이 남자, 어지간한 괴짜가 아니다. "극단에는 남들처럼 공식 오디션을 봐서 들어왔어요. 연출자 선생님은 원래 절 안 뽑으려고 했대요, 장애인이라서요. 하긴 제가 봐도 이게 보통 장애에요? 뇌성마비인데...겉보기에도 저 사람이 뭘 할 수 있을까 할 만한 장애를 갖고 있잖아요. 그런데 너무 잘하고 높은 점수를 받아서 뽑을 수밖에 없었대요."

딱 두 번, 그는 살면서 시쳇말로 배우로 '뜰'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인기 프로가 된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의 초창기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본 감독이 추천해서 '충무로' 장편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 작품은 나중에 신인감독상을 휩쓸고 해외 영화제의 러브콜을 받았던 <고양이를 부탁해>였다. 김씨는 배두나의 친구인 시를 쓰는 장애인으로 나왔는데, 유감스럽게도 유명해지지 않았다. "그즈음 하필 네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씨가 딱 등장한 거죠. 그 사람은 피아노만 있으면 언제 어느 때라도 보여줄 수 있는데, 전 집단으로 같이 해야 하는 종목이라...가려진 거죠(웃음). 영화는 한 달 정도 상영하고 극장에서 내렸고, 지인들도 저를 못 알아봤대요. 장애인인 줄 몰랐다면서요. 너무 정상인으로 나와서...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배우 정준씨인 줄 알았대요.(웃음)"

기회가 또 왔다. 영화가 끝나고 배두나씨의 어머니가 박찬욱 감독을 연결시켜준 것. 박감독은 <복수는 나의 것>을 캐스팅 중이었다. 그를 세계에 거장으로 알린 <올드 보이>의 바로 전 작품이 아니던가. 그런데 촬영 3일 전, 연락이 왔다. 물에서 찍는 씬으로 수정돼 류승범 씨가 대신 하기로 했다고. "찢어지게 가슴 아프고 힘들었죠. 그 와중에 감독님이 승범이 연기 지도를 부탁한다는 거예요(웃음). 했죠. 할 수밖에 없었죠. 장애인 연기를 가르쳐줄 사람이 저밖에 없었으니까. 그 장면은 영화에서 중요했어요. 송강호의 딸이 살해되는데 그 아이의 목걸이를 쥐고 있는 캐릭터였거든요." 류승범은 그 영화로 상을 받았지만, 김호빈은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래도 그는 계속 오디션을 봤다. 27~28세라는 오디션 연령 제한으로 갈수록 기회가 사라지고 있지만, 그 숫자는 이미 1000번이 넘었다.

문턱을 없애고 신발장을 치우고 설치한 낮은 거울 등 체험홈의 무장애시설


강남에서 홀로서기, 체험홈에 오자 살림꾼이 다 됐다

김호빈씨는 작년 말부터 또 다른 변화에 도전하고 있다. 서울시의 장애인 자립생활 체험홈 입주자로 선정되어 강남구 수서동의 한 아파트에서 홀로서기에 나선 것. 자립이 오랜 꿈이었던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다. "새들도 새장에 있으면 좁으니까 힘들어 하잖아요. 풀어주면 넓은 하늘을 날 수 있고 바라보는 입장이 돼서 세상이 멋지고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죠. 평생 시설 안에서 있다 보니 좁은 공간에서 맴도는 수밖에 없었어요."

체험홈이란 그냥 우리가 사는 아파트나 연립 주택과 다를 바 없다. 무장애 시설로 레노베이션을 했다는 점만 차이가 있다. 3~4명의 장애인들이 한 주택에 룸메이트처럼 각자의 방을 가지고 공동 거주하면서 사회적응훈련을 하는 것이다. 김씨가 사는 아파트에도 방 3개에 김씨 말고 2명의 장애인들이 더 살고 있다.

체험홈에는 한 곳당 전문 코디네이터가 한 명씩 배치된다. 김씨의 체험홈 담당인 장성구 코디네이터는 자신의 일을 '체험홈 관리자'라고 설명했다. "전반적으로 사람 대 사람으로서 상담을 한다든가, 집의 불편한 점을 듣고 고치도록 조치한다거나 관리비 납부 등 금전관리, 대중교통이나 은행과 관공서 이용하기, 직업훈련 연계 등을 도와드리는데, 주상씨(김호빈 씨의 본명이다)의 경우는 이미 그런 부분을 스스로가 다 하시거든요. 그래서 여타 체험홈의 코디네이터들 업무보다 상담 쪽의 일이 더 커졌죠." 장 코디네이터와 김씨는 실제로 허물 없는 친구 사이 같았다. 그러는 사이 활동보조인이 도착해서 인사를 했다. 활동보조인은 체험홈에서 목욕, 옷 갈아입기, 세면 등 신변처리와 쇼핑, 청소, 식사준비 등 가사 분야, 출퇴근이나 야외 문화활동 등 이동업무의 지원을 맡고 있다. 아파트 내부는 시원스레 넓고 깨끗했다. 베란다나 현관에서 바라보이는 풍경도 그렇고 전반적인 주거환경은 아주 우수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체험홈에 들어온 처음 한 달은 힘들었다고 한다. "시설에 오래 있다 보니 거기에 맞춰진 생활패턴 때문에 적응이 쉽지 않았죠. 새벽 5시만 되면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이불 개고, 커튼 젖히고, 창문 열고, 씻고...뇌성마비 장애인들은 경직이 심해서 피로가 빨리 쌓이니까 오래 자야 되는데 저는 안 되는 거예요." 시설에서 몸에 배인 것은 단순히 생활패턴만은 아니었다. "시설에 있을 때는 남들이 다 해주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하지 못하죠. 장애가 저마다 다른 사람들 중에서도 그나마 시설에서 최고로 나은 사람들이 체험홈에 들어왔을 텐데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김씨는 이후 체험홈에 들어올 다른 장애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시설에서 해줬던 걸 조금이라도 바라고 들어오지는 마세요. 자기 힘으로 해볼 수 있는 건 미리 다 해보고 들어오시구요."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김씨는 바로 적응했다. "걱정할 건 없어요. 시간이 지나니까 자동적으로 적응이 되더라구요. 입력이 되는 거죠(웃음)." 물론 전혀 몰랐던 걸 알아야 했고, 걱정 안 하고 살았던 것을 하나하나 고민해야 했다. 하다못해 장보기나 생활용품 사는 것부터 가계부 쓰는 것까지 혼자 해야 했다. "여기가 또 강남이잖아요. 저는 애초부터 오디션 때문에 위치상 강남 쪽에 배정해 달라고 한 건데, 막상 살아보니 물가가 '오지게' 비싼 거에요(웃음). 솔직히 맨 처음에는 멋모르고 요 근방에서 다 샀는데, 나중에는 반찬은 어디에서 사야 되고, 생활용품은 어디서 사야 하는지 알게 됐죠." 그렇게 알뜰살뜰 생활의 지혜가 커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결국 자립하면 피가 되고 살이 될 경험들이 아닌가.

그러나 금전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배우라는 직업의 특성상 불안정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아무리 작품을 해서 돈을 번다고 해도 수입이 얼마 안 돼요. 그러다 보니 돈을 많이 못 모았어요. 지금 통장에 1000만원 정도..." 다행히 들어오는 돈은 잘 안 쓰는 편이다. "군것질을 잘 안해요. 더울 때 아이스크림 사먹는 것 빼고는(웃음)." 술은 알레르기가 있어 공연 뒷풀이에 가도 참석만 하는 수준이다. 담배도 끊은 지 오래다. "극단 식구들한테 욕 많이 먹고 다시는 안 핍니다. 외모적으로나 목소리나 그쪽 캐릭터가 맞는다고 해서 주로 교복 입고 나오는 학생 역할을 하는데, 흡연을 하면 목소리가 걸걸해지고 가래가 끓는다고 해서요." 아, 이 남자, 이렇게 자기관리가 철저하다면, 성공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싶었다.


인생은 모험과 도전이다! 내가 배우가 된 이유

체험홈에서 6개월 내지 최장 18개월까지 머물면서 성공적으로 자립훈련을 마친 입주자들에게는 2단계인 '자립생활가정' 입주의 기회가 주어진다. 역시 일반 가정 같은 주거환경에서 기본 2년, 최장 5년까지 거주할 수 있다. 2011년 현재 총 15개의 체험홈에 34명의 장애인들이 입주 중이며, 자립생활가정은 총 3개소에 7명이 살고 있는데 올해 안에 21개소까지 확보할 계획이다. 이미 체험홈을 거쳐 자립생활가정에 입성한 이들 중 지체1급의 한 장애인은 완벽하게 독립에 성공했다. 김씨와 같은 체험홈의 또 다른 입주자인 정경용씨는 곧 있으면 다른 체험홈에 거주하는 위현주씨와의 결혼을 앞두고 보다 구체적으로 독립을 계획하고 있다.

김호빈씨도 배우로서 성공해 돈을 모으고, 자립생활가정을 거쳐 결국 자립할 수 있을까? 김씨의 말은 다시 원론으로 돌아갔다. "제가 처한 상황에 안정된 것이란 없어요. 모두가 모험이에요, 도전이고.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이 거의 대부분 모험인 것이죠. 여느 장애인이라면 도전을 안 하겠죠. 뻔히 아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쓰지 않을 거라는 걸. 하지만 제가 오디션을 계속 보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오늘은 좌절일지라도 적어도 시대가 바뀌면서 언젠가는 나를 쓸 일이 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를 알려서 기억 속에 남게 하자는 거죠. 근데 편견의 벽에 갇혀 살다 보니 장애인 배우를 배우로 보는 사람이 드물어요. 제가 배우가 된 첫 번째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세상의 편견의 벽을 조금은 깨보고 싶다." 단기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도 있었다. "일단은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제, 대종상 등 우리나라 4대 영화제 신인상을 휩쓸고 싶어요. 제가 장애인이다보니까 신인상을 한 번 타면 인정을 못 받을 것 같아서요."

이쯤 됐으니 고백해야겠다. 김씨를 만나는 순간부터 이미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와장창 무너졌다는 것을. 아니 녹아버렸다는 편이 차라리 맞을 것이다. 그걸 넘어서 분명 이상한 기운을 받고 있었다. 건강하고 긍정적인 어떤 에너지랄까? 수족이 극도로 불편한 뇌성마비 장애인에게서 심신이 나약한 한 명의 비장애인이 힘을 얻다니. 그런데 그는 마지막 한 마디로 무릎마저 탁 치게 만들었다. "장애인들은 불쌍하고 안쓰럽고 도와줘야 되는 존재인데, 그건 과연 장애인뿐일까요?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사는 미래가 더 행복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나이 들면 그렇게 되거든요. 노인이나 장애인이나 똑같죠.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네는 결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별 관심이 없죠. 장애인이 잘 살아야 자기네 미래가 잘 사는 거라는 걸 망각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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