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을 걸으면 누구나 마음이 편해진다

이예지

발행일 2011.04.19. 00:00

수정일 2011.04.19. 00:00

조회 4,674

오후 2시. 수문장 교대식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린 덕수궁 앞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노란색 가디건에 풀잎색의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흩날리며 걸어오는 예쁜 소녀가 보이기 시작했다. 봄맞이 시민과의 동행취재 세 번째 코스인 정동길을 나들이를 위해, 특별히 섭외한 이화여고 졸업생 이예지씨였다. 바쁜 생활을 하다가도 이곳에 오면 왠지 모를 편안한 쉼에 지그시 눈을 감고 긴 호흡을 하게 만들어주는 매력적인 정동길. 그 편안함에 처음 만난 그녀와 걸으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정동길을 이예지씨가 직접 소개한다.

 

높은 건물 사이 낮은 덕수궁 대한문의 우렁찬 소리,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복닥거리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시청역을 나오면, 건물들 사이로 정겨운 덕수궁이 보인다. 빽빽하게 높은 건물들 사이에 자리 잡은 고풍스러운 전통의 낮은 문. 그 문으로 걸어가다 보면 부리부리 하게 눈을 뜬 수문장이 보인다. 시간을 보니 오후 2시. 하루 3번(오전11시, 오후2, 오후3시30분) 열리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의식이 열릴 시간이다.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덕수궁 앞마당. 수문장 교대의식의 인기를 엿보게 해준다. 여기저기 외국인 관광객들도 쉽게 눈에 띈다. 그들을 위해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도 설명이 제공된다. 식이 끝난 후엔 한복을 입어보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인기 만점인 관광코스이기도 하다.

한 손으로 새겨가는 마음의 글자, 돌담 길 전각 아저씨

힘차고 우렁찬 수문장 교대식을 하는 대한문 옆 돌담길을 자세히 보면, 전각 작품들이 쭉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이 전각 작품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관람하는데 운치를 더해주는 필수 요소지만 이 자리에 이 전각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고등학교를 이 근처에서 다닌 덕분에 매일 이 돌담길을 오가면서 발견한 전각 작품들은 지치고 힘든 등하굣길에 힘을 주는 요소 중에 하나였다. 전각 작품에는 명언이나, 좋은 말씀 구절, 그림 등이 새겨져 있다. 한 작품씩 감상하다 보면 이 작품들을 탄생시킨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양손으로도 힘들 것 같은데,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나무판에 새로운 글자를 불어 넣는 아저씨는 한 손이 없다. 왼손에는 끌을 들고 다른 한쪽 팔에는 망치를 고정시켜서 한 글자 한 글자 심혈을 기울여 파고 계시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면 장인정신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 동안의 품고 있던 불평, 불만들이 쏙 들어가기도 한다. 돌담길을 쭉 따라 가다 보면 전각 아저씨 이외에도 그림을 그리시는 분, 군밤과 오징어를 팔고 계신 아주머니 등 다양한 분들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덕수궁 돌담길에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속속들이 숨어있다.

내 멋대로 생각하고 보이는 대로 느끼기, 서울 시립 미술관

정동길에 자리 잡고 있는 많은 문화시설 중 가장 인기가 좋은 서울 시립미술관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미술관을 편한 장소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대표적인 미술관이다. 스타작가들의 기획전부터 미술대전으로 처음 등용된 신인 작가들의 전시까지, 정동길에 놀러 왔다가 편안하게 둘러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있다. 지금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는 ‘서울미술대전, 극 사실회화- 눈을 속이다.’전을 하고 있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한 외국작가들의 그림은 아니지만, 우리가 쉽게 가서 보고 관람할 수 있는 작품들 위주로 전시 되어있다.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추상주의 보다는 보이는 그대로 그림을 보면 되는 극 사실주의 회화는 미술 감상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전시가 될 것이다. 참고로 미술 감상을 재미있게 하는 나만의 팁을 나누자면, 허물없는 친구와 함께 가서 초등학생의 마음으로 전시를 보는 것이다. 내겐 미술관을 매번 같이 가는 친구가 있는데 미술작품을 보고 심오한 작품 세계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보이는 서로 이야기를 서로 나눈다. 예를 들어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의 초상화를 봤을 때, '이 사람의 나이는 몇 살이나 될까?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이랑 많이 닮은 것 같다.' 등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림에 불어넣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면, 멀게만 느껴지는 미술 작품들이 내 이야기 속에 있는 가까운 것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여고생의 풋풋함이 묻어나는 봄 산책길, 이화여자고등학교

시립미술관을 나와, 발걸음을 옮긴 곳은 나의 청소년 시절이 고스란히 묻힌 이화여고였다. 푸른 노천극장에서 드렸던 촛불예배,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뛰어다니던 기억,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곳에서 나누던 무서운 이야기, 모든 기억들이 다시금 피어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정동길 중간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는 곳이지만, 학교라고 이유로 일반인들이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쉽사리 들어오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공연장으로도 사용될 만큼 열린 공간인데다,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장소라 누구나 가볍게 산책하면서 기분전환하기 좋은 장소이다. 특히 노천극장은 서울에 올라온 사촌동생에 아주 마음에 들어 했던 곳이다. 이 봄, 아이들과 어디로 놀러 가야 할까? 라는 고민에 빠진 주부님들이 계시다면 적극 추천하는 소풍 장소다. 또한 이화여고 백주년 기념관에서는 다양한 공연들이 열리고 있다. 4월 23일부터는 브로드웨이에 초청된 한국 비보이 댄스 팀의 작품인 ‘리턴 투 스트릿’이 공연될 예정이다. 공연도 보고 백 주년 기념관에 숨어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까지 즐긴다면, 복잡한 도시 생활에 한 템포 쉬어 갈 수 있는 쉼표 같은 공간이 될 것이다.

도심 속의 나만의 ‘맛’ 정원 찾기, 어반가든

여고생들의 풋풋함을 느낄 수 있는 학교까지 둘러봤다면 이제는 슬슬 배가 고파 올 것이다. 오감 중에 가장 중요한 건 미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나들이 코스에 맛집을 끼워 넣는 건 당연한 일. 이화여고 후문을 지나 조금 올라오다 보면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이 보인다. 회관 반대쪽을 보면 작은 골목이 숨어있는 걸 찾을 수 있는데, 이 골목 안쪽에 오늘 나들이의 입맛을 책임져줄 장소가 숨어있다. 골목의 초입에 초록색 간판이 보인다. “어반가든(urban garden)”, 뜻 그대로 도심 속의 정원이다. 골목을 돌아 도착하면 왜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작은 소품부터 정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연분위기를 내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 쓴 이 식당은 들어오는 순간부터 기분이 상쾌해진다. 요즘 날씨가 좋으니 테라스 쪽에 자리를 잡는다면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유럽식 정원에서 음식을 먹는 듯 한 기분이 들 것이다. 연인끼리 분위기를 내고 싶을 때는 BBQ요리를, 가족들과 푸짐하고 좀 저렴하게 먹고 싶다면 파스타와 리조또 요리를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부모님 결혼기념일 때 두 분 끼리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하시도록 추천해 드렸는데, 분위기 좋아 데이트 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좋아하셨다.

카페에서 친구와의 조용한 수다 ’예술영화’, 광화문 시네큐브

어반가든에서 나와 경향신문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큰 대로변이 나온다. 이 대로를 따라 아래쪽으로 쭉 걷다 보면 ‘예술영화관’ 광화문 시네큐브가 나온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예술영화’라고 하면 느껴지는 장벽들이 있다. 그러나 예술영화라고 해서 특별히 더 배워야 한다든가, 영화에 대해서 다 많이 알 필요는 없다. 상업영화들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떠는 술자리와 같다면, 예술영화는 나와 상대방 단 둘이서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용하게 나누는 대화와 같다.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얼마나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는 가에 따라서 상대방의 얘기가 들리는 정도가 달라지듯, ‘이건 예술영화니까, 나한테는 어려울 거야’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영화를 본다면 그들이 하는 소소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1일부터 개봉하는 제인 에어는 예술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다. 청소년 시절, 세계 명작 소설 중에 한 권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제인에어’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스토리를 따라가기 어렵지 않고 친숙하게 느낄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걸어오던 이 정동길은 보면 볼수록 푸근한 곳이다. 몇 번이나 다시 읽어도 좋은 글귀가 쏟아져 나오는 책처럼, 매번 갈 때 마다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준다. 바쁜 생활을 하다가도 답답함을 느끼면 나는 정동 길로 간다. 그곳에서 보고 느끼고 살아 숨쉬는 기억들과 함께 거리를 걷다 보면 다시 힘을 얻는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으면서 힘을 얻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얻었으면 한다.

 

글 : 이예지 / 구성 및 사진 : 하이서울뉴스 박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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