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도 늙지 않는 거대한 짐승이 있다

시민기자 이은자

발행일 2010.09.01. 00:00

수정일 2010.09.01. 00:00

조회 3,915

박범신 작가를 개인적으로 근거리에서 뵌 적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연희문학촌 목요낭독의 시간에 객석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다. 처음에는 그곳에 입주한 작가 중 한 분이라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촌장이었다. 시골 이장처럼 촌장, 참 재미있다. 그 때부터 하이서울뉴스 독자들 중에는 작가와 교수로서의 박범신만 알지, 연희문학창작촌 촌장에 서울시 문화재단 이사장이라는 직함 둘이 더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이들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마침 8월 행사에는 독자들과 대화의 시간도 있다 하여, 오래된 일이었지만 절필선언과 왕성한 작품활동, 촌장, 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의 그의 행보에 대한 여러 가지 궁금했던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연희문학창작촌을 다시 찾았다.

이은자: 여름 끝자락에 박범신 작가를 뵈니까, 70년대 신춘문예에 발표됐던 '여름의 잔해'라는 소설이 갑자기 떠오른다. ‘그해 여름’이나 ‘그해 겨울’ 같은 단순하고 명료한 제목들에 비해 상당히 생소했고 난해하기까지 했다. 2010년 ‘여름의 잔해’를 작품으로 새로 쓴다면? 당시의 집필 배경과 이곳 문학촌 촌장으로서의 한 말씀도 듣고 싶다.

박범신: 73년 당시 사회비판적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었다. 사실 '여름의 잔해'는 몇 년 전에 써두었던 작품을 수정해서 내놓았는데 데뷔작이 된 것이다. 상당히 그로테스크하고 탐미적 스타일의 작품이다. 일본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여름의 잔해를 여름이 타고 남은 것, 바로 가을이라고 했다. 여름은 욕망의 발화 같은 것이다. 작가 이상도 여름의 녹음, 그 생명력을 보면 ‘무섭다’고 했다. 여름은 자기 정체성도 안 보이고, 내면의 깊이도 확인할 길이 없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깊어져야 정체성, 내면의 깊이, 본질적인 그리움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가을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곳 문학창작촌에서 경장편 '비지니스'라는 작품을 한 권 썼다. 이미 ‘자음과 모음’, 중국 ‘소설계’라는 잡지에 동시 발표됐다. 자본주의적 욕망, 그 마지막에 만나는 파탄과 마지막 끝이 어디인가를 질문하는 소설이다. 문학촌은 작가 생산기지로서의 역할, 문학 나눔의 교두보로서 시민과 작가가 소통하는 사랑방 교실로서의 역할, 외국작가도 이곳에 함께 머무르면서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의 소통과 교류를 도모하는 곳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곳에 20여 명의 국내외 작가들이 입주하여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데, 젊은 독일부부 작가의 낭독 일정도 잡혀 있다. 서울시에서 가장 생산력이 높고, 평가가 좋은 문화예술기지의 선례가 될 것이다. 10년 이내에 이곳은 한국문학의 중심 생산기지로서 명소가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작품이 여기에서 써질 수도 있다.

서울시 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현재 서울의 문화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본다면? 이사장을 맡은 이후 서울시 문화예술의 변화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본다. 르네상스는 회복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서울의 문화콘텐츠 생산성은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가 조성한 다양한 창작공간의 효과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 문화서울의 인프라가 성공적으로 구축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관이 지원사업을 직접 주도하는 건 여러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이에 서울시가 직접 나서서 지원할 수 없는 다양한 예술문화 장르에 대해 우리 문화재단이 지원하고 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예술이 일방적으로 자본의 하위에 놓이는 것을 경계하는 일이다. 문화재단은 공익적 기관이므로 특히 기초예술분야처럼 소외받기 쉬운 분야에 골고루 스며들도록 지원하는 방안을 갖고 있다.

베스트셀러의 작가라기보다는 영원한 청춘스타로서 더 사랑을 받고, 많은 애독자들의 가슴을 콩닥거리게 했던 작가가 1993년 어느 날 절필선언을 했고, 세월이 흘러흘러 지금은 서울시 문화예술을 관장하는 자리에 있는데 그 배경이 많이 궁금하다. 절필선언으로 독자들에게 잊혀졌던 것도 사실일 텐데……. 당시의 사회적 배경, 여건이 문제였는지? 혹시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이런 고백은?

절필하고 용인 변방에 혼자 살면서 독자들이 잊기를 기다렸다. 일부 문학이 도구화하는 등, 사회적인 배경으로 설명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인기란 거품 같은 것이다. 단순히 인기 있는 작가가 아니라 더 좋은, 오래 남을 작가가 되기 위해서 그때로서는 절필할 수밖에 없었다. 절필은 작가의 자기 죽음에 대한 선언이다. 결단을 통해서 새로운 탄생을 꿈꾸었다고 할 수 있다. 유명작가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고, 문학과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물으면서 내 자신과 만났던 시기로, 세속적인 욕망, 자본주의 억압으로부터 더 자유로운 작가로 거듭나는 시기였다. 문학과 삶과 존재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겸허한 자기 성찰과 사유의 시간을 가졌다. 그 시절 사유의 공간으로 선택한 곳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멀게 느껴졌던 히말라야였다.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등 히말라야를 열 번 넘게 다녀왔으며 킬리만자로 트레킹에서 해발 5,895미터의 우후루 피크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절필 3년은 새로 태어나기 위한 길고 고통스러운, 자기 안으로의 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

2007년 9월부터 2008년 1월까지 5개월 동안 네이버 블로그에 '촐라체'라는 소설을 연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에 이 소설에 대해서 잘 몰랐을 때는 새로운 글씨체인 줄 알고 어떤 형태의 글씨인가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검색도 해보았다. '촐라체'의 탄생 배경을 알고 싶다.

에베레스트 서남쪽에 있는 촐라체(6440m)라는 산의 정상을 오른 뒤 하산 중에 실족한 형제가 7일 만에 극적으로 생환한다. 가혹한 생존의 갈림길에서 신뢰의 끈을 놓지 않고 끝내 인간의 길을 걸어간 두 남자의 초상을 그린 것이다. 산악인 박정헌, 최강식이 실제로 촐라체 등반에서 겪은 조난과 생환의 경험이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다. '네이버'에 연재되며 누적 방문자수 100만 명을 돌파한 소설 '촐라체'가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목숨을 걸고 험난한 등정에 나선 두 형제를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은, '홀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 그 뜨거움에 대한 목마름'에 관한 이야기다. 클래식하고 정통적인 소설이어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는데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덩치는 크지만 정체성은 확실하지 않고, 자본주의 욕망에 흔들거리는 요즘 젊은이들을 위해 썼는데, 의외로 많은 젊은이들이 관심 갖고 읽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정통적 글쓰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패스트푸드의 범람에 한식정찬을 선보였다는 문단의 치하도 있었다. 더구나 내가 ‘촐라체’를 쓴 이후 요즘은 인터넷 연재가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나로서는 문학의 마당을 넓혔다는 부가적인 보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7월에는 소설 '나마스테'를 원작으로 한 연극 '서울, 나마스테'가 공연됐다. ‘나마스테'는 이주노동자 네팔 청년 카밀과 미국이민에 실패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신우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요즘 다문화가정이 늘면서 관심이 더 높아진 것 같다. 다문화가 서울시 문화의 한 축을 끌 수도 있을 텐데, 다문화 대책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기 바란다.

‘나마스테'는 외국인 노동자를 부당하게 차별하는, ‘개구리 올챙이 때 생각 못하는’ 한국사회와 일부 한국인에 대한 고발이다. ‘나마스테’ 이후엔 외국인 노동자를 다루는 작품들이 제법 많아졌다. 다른 문화, 민족, 인종에 대한 편견은 작가로서 가슴 아픈 일이다. 서울은 특수한 문화가 결집되고 나가는 관문이다. 지역문화가 모이고 통합되어 새로 가공되고, 그것이 세계로 나가고, 또 세계문화가 들어오는 관문이며, 함께 공존하는 마당이다. 문화는 서열이 없다. 외국 사람은 물론이고, 다양한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배우고 또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글로벌 시대다. 혼자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함께 살아야 한다. 다양한 문화의 유입이 최고조에 이른 서울은 2000년대, 새로운 문화도시로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3년간의 공백을 제하고는, 끊임없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근간, 열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 마음 속에 나이 들어도 늙지 않는 거대한 짐승 같은 것이 들어 있다고 느낀다. 일종의 창조적 자아 같은 것. 특히 최근에 계속 써낸 ‘촐라체’, ‘고산자’, ‘은교’를 나는 혼잣말로 ‘갈망의 삼부작’이라고 부른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情恨)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개발을 앞세운 경제제일주의로 달려와 번영은 얻었으나 그 결과 경쟁과 욕망 또한 가속적으로 폭발했다. 정신적으로는 더 황폐해지고, 따라서 삶의 본원에 대한 갈망은 깊어지고 있다고 본다. 어떻게 사는 게 진정한 행복인가. 갈망의 삼부작엔 그런 질문이 담겨 있다.

얼마 전 아트밸리 예술극장이라는 동네 무대에서 '빈 국립오페라 앙상블' 내한공연을 감상했는데, 정말 고무적이었다. 각 구별로 문화재단이나 미디어센터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서울문화재단의 성공 필수요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문화재단의 정의와 필요성에 대해서도 시민 이해 차원에서 다시 한번 정리해 주기 바란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문화예술이 자본에 예속되고 하위에 놓인 것을 경계해야 한다. 공익재단은 돈이 안 되더라도 기초예술에 대한 투자를 적절하게 하고 그 생산성을 도와서 모든 시민들에게 골고루 분배되고 배달되게 하는 문화적 순환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각 구 단위가 아니라, 동네 주민자치센터까지도 문화예술 정보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국립극장이나 예술의전당에만 꼭 가야 하는가. 슬리퍼만 신고 나와서도 수준 높은 문화예술의 향기를 접할 수 있어야 한다. 크고 화려한 건물보다는 그 안에 무엇이 담기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관련자의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과 마인드가 관건이기도 하다.

디자인 서울로서의 외형적인 변화나 재정비돼 가고 있는 서울의 변모에 대해서 긍정적이면서도 대다수의 서울시민은 서울문화재단이 추구하고자 하는 서울의 미학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하고 있다. 재단이 펼치고 있는 일련의 사업들에 대해서 서울시민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심미안을 가져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기 바란다.

문화재단의 기본은 좋은 작품의 생산력을 응원하고 고취시키는 일이다. 시민들의 문화예술도 많이 지원하고 있다. 심미안을 길러주기 위한 시민예술교육도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곳 문학창작촌의 강좌나 목요낭독도 갈수록 반응이 뜨겁다. 서울시에서 실시하고 있는 ‘문화인증제’도 좋은 예다. 개인이 하는 예술전시장이나 공연 가능한 카페, 책 읽는 서울 등 우리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을 만날 수 있는 문화 콘텐츠가 많다. 시민들이 쉽게 문화예술의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시민과 예술가들의 수준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예술의 수용자 교육도 중요하고 참여도를 높이는 분위기도 중요하다. 요즘 경제가 안 좋아서인지 시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비해 기업 등의 예술분야에 대한 지원이 많이 인색한 실정이다. 기업이나 지도층의 문화에 대한 사려 깊은 관심과 기여 또한 문화서울을 만드는 데 중요한 일이다. 서울의 문화예술 생산성과 그 품질은 세계적이다. 우리는 훌륭한 재능을 갖고 있는 민족이다. 문제는 그 재능의 올바른 개발과 발현, 그리고 우수한 문화예술작품의 평등하고 유기적인 배분이다. 훌륭한 문화예술을 생산해서 싼값으로 시민 누구나 즐길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공익적인 재단이 추구해야 할 방향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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