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버린 `서울의 풍경`을 만나는 날

시민기자 이나미

발행일 2014.05.30. 00:00

수정일 2014.05.30. 00:00

조회 1,676

실제 동대문운동장에 붙어 있던 간판. 일부 유실된 글자는 특수 제작했다.

[서울톡톡] '박물관이란 사라지고 없어진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나누는 석별의 장소'가 아닐까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특별전 <석별가>. 사라져버린, 사라져가는 서울 풍경을 선보인 이번 전시는 역사가 된지 얼마 안 된 '동대문운동장'과 '고가도로'를 추억하는 자리다.

역사는 길었으나, 사라짐은 한 순간이었다. 우리에겐 여전히 '동대문운동장'이란 지하철 역명이 익숙하듯, 현실 속 사라짐이 기억 속 사라짐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서울역사박물관(www.museum.seoul.kr)에서 이 두 시설을 다시 만나, 서울의 기억을 공유해보는 건 어떨까? 전시는 오는 7월 13일까지 열린다.

한국 프로야구 창단 개막식이 열린 동대문운동장, 당시 동대문운동장의 외관

석별가 Ⅰ

1982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의 옛 명칭)의 모습이 바뀌는 일이 벌어진다. 스포츠와 대중문화 양성을 표방한 전두환 정권의 정책으로, '프로야구'가 개막된 것이다. 이어 이듬해엔 '프로축구'도 개막된다. 이른바 '프로'가 육성되는 스포츠가 등장하였다. 트로피는 더욱 화려해지고 구단별 응원도구와 각종 상품들이 등장했으며, '서포터즈'가 결성되었다. 아마추어시대의 끝자락이자 프로시대의 출발점에 '서울운동장'이 끼어 있었다.

실제 동대문운동장에 설치되었던 안내판들

1984년.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 개최지가 서울로 확정된 뒤, 잠실엔 주경기장을 비롯한 종목별 운동장 시설들이 개장된다. 같은 하늘 아래 두 태양이 있을 수는 없는 법. 결국 잠실운동장 명칭은 '올림픽주경기장'으로, 기존 '서울운동장' 명칭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변경된다. 이어 동대문운동장은 아마추어 산실로 때론 집회와 시민행사로 조용히 제 역할을 한다.

동대문운동장 특수를 누렸던 스포츠상가 및 식당 주인 등 일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전시에서 연출 및 재현된다.

2003년 축구장이 폐쇄된 뒤 풍물시장이 조성되었고 2007년 전국대학야구 결승전을 끝으로, 철거가 진행된다. '동대문운동장'은 결국 이 곳의 마지막 이름이 되었다.

2007년 여름. 철거를 반대하며 동대문풍물벼룩시장 내 상인들은 투쟁을 펼쳤다. 오른쪽은 철거되는 모습

조선시대 군사시설인 하도감 터에 지어져 프로야구의 개막과 최초 라디오 중계가 이뤄졌던 동대문운동장. 근대문물을 받아들인 최전선에 있던 장소이자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곳. 이 모든 운동장의 모습을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동대문운동장의 시간을 기억하고 진정한 작별한 고한다. '잘 가, 동대문운동장'

석별가 Ⅱ

고가도로는 한 때 모던도시의 이상도로였다. 현대 도시계획의 창시자들은 도시의 혼잡과 교통문제 해결책으로 땅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공중에서 자유롭게 달리는 고가도로를 꿈꾸었다. 그 예로 건축가 르 꼬르뷔제는 파리를 고가도로로 덮는 도시개조안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전 유럽을 고가도로망으로 엮기를 원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960년대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선 시민들, 한국의 발전상을 알리는 건축물로 각종 매체에 실린 '고가도로'

1960년대 서울은 폭발적인 인구집중으로 교통문제가 심각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6년부터 재임한 김현옥 시장은 건축가 김수근과 함께 연희입체교차로부터 마장동까지 도심을 관통하는 고속고가도로를 구상, 서울을 입체도시화하려는 거대 건설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각계 전문가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서울 도심 곳곳에 고가도로가 건설되면서, 당시 도심을 60km/h 이상의 시속으로 달릴 수 있는 스피드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때부터 고가도로는 발전하는 서울 도시풍경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국내 첫 고가차도였던 `아현고가도로`가 1968년에 개통되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현재, 이제 고가도로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발전의 상징에서 철거해야 할 흉물이 되었다. 구조물은 낡아 안전에 위협이 되고, 정작 교통 흐름의 개선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주변 건물들의 토지이용에 장애가 되어 상권을 침체시키며, 보행교통에 불편을 끼쳤다.

전시장에 옮겨놓은 아현고가도로 `교명주`와 철거된 `32번째 교각`의 일부.

'1968년 9월 개통. 길이 940m, 폭 16m, 공사비 2억 8,100만 원 투입. 2014년 6월 철거, 철거비 약 125억 원 투입.'

국내 첫 고가차도인 '아현고가도로'가 4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까지 서울에 있는 101개 고가도로 중 16개가 철거되었다. '안녕! 고가도로'

아현고가도로 철거 전과 후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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