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의사를 아십니까?

시민기자 이승철

발행일 2014.05.20. 00:00

수정일 2014.05.20. 00:00

조회 2,008

[서울톡톡] "이봉창 의사는 침략의 상징인물인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애국지사잖아요? 여기 표지석은 너무 비좁은 곳에 작고 초라하네요, 본래 생가터는 다른 곳이라는 말도 있던데..."

이봉창 의사 생가터 표지석을 보며 지나가던 시민이 한 말이다. 지난 화요일, 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 묘역을 찾았다.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 1번 출구 뒤쪽에 있는 이봉창 의사 생가터 표지석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관심을 보이는 시민에게 이봉창 의사를 기억하느냐고 묻자 선뜻 대답한 말이다.

"용산구 효창동 118-1번지는 독립운동가 이봉창(1901~1932) 의사가 태어나 살던 곳이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도쿄 요요키의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끝내고 돌아가는 일왕 히로히토를 폭탄으로 살해하려다 실패하였다. 그해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효창공원 백범기념관 앞 이봉창 의사 동상, 이봉창 의사 생가터 표지석

표지석에 쓰여 있는 글이다.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은 따뜻한 햇살에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삼의사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삼의사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는 옆에는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을 둘러보고 백범기념관 앞으로 나서자 폭탄 투척 자세로 세워져 있는 이봉창 의사의 동상이 서 있다.

의사는 1901년에 태어나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며 일본인들에게 많은 차별과 설움을 겪었다. 1919년 철도국 임시인부로 들어가 일하다가 1924년 사직했다. 의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철공소 직공 등으로 오사카와 도쿄 등지를 전전하며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으로서의 설움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의사는 1931년 1월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을 응징하기 위해 수류탄 2개를 가지고 일본으로 떠났다. 도쿄에 도착한 그는 이듬해 초인 1932년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대륙침략의 도구로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의 집정 푸이와 도쿄 교외 요요키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거행한다는 신문보도를 보았다.

관병식은 경비가 너무 삼엄하여 거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날 오후 2시, 도쿄 고지마치 거리 경시청 앞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왕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굉장한 폭음과 함께 수류탄이 폭발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왕이 탄 마차가 아니었다. 다른 수류탄을 앞서가던 마차에 다시 던졌다. 의거 후 자살용으로 쓰려던 수류탄이었다. 그러나 폭발하지 않았다.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효창공원 내 이봉창 의사의 묘

일왕의 응징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의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의거의 여파로 일본 내각은 총 사퇴했다. 중국 신문들은 앞 다퉈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그리고 3개월 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로 이어지는 항일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의사는 그해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침략의 상징인물을 응징하려했던 의사의 나이, 32세였다. 이봉창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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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이봉창 #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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