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곳곳에 숨겨진 역사의 흔적을 찾다

시민기자 이승철

발행일 2014.03.13. 00:00

수정일 2014.03.13. 00:00

조회 2,591

김장생, 김집 선생의 생가터가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

명동역에서 남산까지 셔틀버스 운행, 케이블카 이용도 편리

[서울톡톡] "혹시 이분들이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 아세요?" "글쎄요? 예학의 태두요 대가라고 써있군요, 이름은 얼핏 들어본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네요." 지나가는 몇 사람에게 물었지만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정동길이 만나는 사거리 지점에서 왼편으로 꺾으면 시립미술관이 보인다. 그 입구를 따라 정다움이 느껴지는 좁다란 숲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왼편에 작은 표지석 하나가 나타난다.

표지석에는 '김장생, 김집선생 생가터', '조선시대 5현의 한 사람으로 예학(禮學)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과 그의 아들로 예학의 대가인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1574~1656)이 태어나신 곳이다'라고 쓰여 있다. 근처에는 퇴계 이황의 집터 표지석도 서있다.

그럼 조선시대의 역사적 인물인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일까?

숭유배불(崇儒排佛), 즉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정치, 문화, 사상의 건국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중에서도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성리학의 큰 흐름은 퇴계 이황을 따르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따르는 기호학파 두 줄기로 대별되었다.

퇴계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6~1584)보다 한 세대 늦게 태어난 김장생은 그 시대 최고의 석학으로 꼽혔던 구봉 송익필(1534~1599)에게서 예학을 배우고, 율곡 이이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그의 성리학은 이이의 학문세계와 맥을 같이하여 기호학파에 속했다. 특히 성리학의 중추를 이루는 예학의 깊이가 깊어 예학의 태두로 칭송받았다.

김장생, 김집 선생 생가터 표지석

그의 아들 김집(金集)은 부친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을 집대성한 큰 학자로 추앙받았다. 사후에 해동18현(海東18賢)으로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해동 18현은 신라시대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시대의 안향, 정몽주, 그리고 조선시대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를 일컫는 이름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학문과 도덕의 수준이 깊고 높아 백성들이 하나같이 스승으로 우러러 받드는 인물들이다. 조선시대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대대손손 가문의 자랑이었는데 김장생, 김집 부자는 함께 배향되는 더 할 수 없이 큰 영광을 누린 것이다.

사계 김장생은 광산 김씨로 조선 선조 때인 1548년에 당시 서인의 중진이며 대사헌인 아버지 김계휘의 아들로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기호학파의 대가인 이율곡과 송익필의 문하에 입문하여 성리학과 예학을 전수받았다. 영민한 그는 수제자로서 자격을 갖추었지만 과거에 응시할 겨를도 없이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30세 되던 해 뛰어난 학문을 인정받아 창릉 참봉에 천거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호조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다, 선조 말과 광해군 초에는 단양, 양근, 안성, 철원 등 지방관으로 일했다. 철원부사 시절인 광해군 5년(1613년)에는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위기를 맞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후 관직에 대한 욕심이 없던 그는 오직 학문에 정진하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특히 예학에 밝아 당시 선비들은 예에 대한 다툼이나 의문이 생기면 모두 그를 찾아 문의를 하고 답을 얻었다고 전한다. 오늘날까지 전해진 상례와 제례 등의 예법도 그의 저서 <가례집람(家禮輯覽)>과 <상례비요(喪禮備要)>에서 전해진 것들이다. 그의 뛰어난 학문은 아들 김집과 우암 송시열, 동춘 송준길을 비롯해서 강석기, 이후원, 등에 전승되어 예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깊은 학문세계를 구축했던 탁월한 학자 부자가 태어난 생가 터는 지금은 오직 표지석 하나가 세워져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조선 5백년의 도읍지였던 우리 서울은 곳곳에 이렇게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들이 많다. 비록 작은 흔적이지만 숨겨진 사실을 알고 돌아보면 우리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주변의 시립박물관과 덕수궁, 그리고 정동길에서 만나는 다른 유적들도 함께 돌아보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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