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말고 다른 것은 없다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고은빈

발행일 2013.02.18. 00:00

수정일 2013.02.18. 00:00

조회 1,704

[서울톡톡] 애쓰지 않는다. 웃음을 자아내려, 울음을 자아내려 하지 않는다. 반짝이는 조명, 현란한 몸짓, 사방을 울리는 음악과 노랫소리도 없다. 대신 배우들의 대사와 막과 막 사이 어둠에서 배어 나오는 성찰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연극이다. 갓 태어난 4개의 창작희곡이 배우들의 목소리만으로 전해지자 그 울림은 더 뚜렷해져온다. 남산희곡페스티벌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희곡, 지금도 가슴 설렌다

무대 위 소품이라고는 말라비틀어진 난초 화분뿐. 집이라는 공간에 벽이 없다. 다만 흰 빛으로 그려진 선만이 방과 방, 안과 밖을 구분할 뿐이다. 이상한 것은 공간 구성 뿐만이 아니었다. 배우들은 지시문에 쓰인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말로 표현될 뿐이었다. 절룩임은 말 뿐이지 걷는 모양새는 멀쩡하다. 서로를 바라보며 해야 할법한 대사들조차 그들은 앞만 보고 읊는다. 덕분에 목소리 말고는 다른 데 정신이 팔리지는 않는다. 한 가족이 해체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욕망과 원망, 슬픔이 뒤섞여 나타난다.

처음에는 모두가 속내를 감추고 웃으며 나타나지만 뻐꾸기시계가 우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갈등은 뚜렷해진다. 암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아픈 남편을 요양원에 보내고 집을 팔겠다는 어머니의 선언에 재산을 챙기지 못하고 바람까지 피우는 것 같은 남편이 원망스러운 큰 며느리, 무뚝뚝한 장남, 형수가 자신의 아내를 들쑤셔 이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둘째 아들은 서로 날카로운 말로 서로를 상처주기에 바쁘다. "예? 어머님? 제사를 저희가 챙기라고요?(중략, 아들들이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을 찬성한 후)… 그래도 아버지다. 당신들도 자식들이 늙고 아프다고 버리면 좋나? 당신들이 아버지랑 다른 게 뭐꼬?"라는 큰 며느리의 말에 둘째 아들은 "고아인 주제에…"로 응수한다. 이에 큰 며느리는 "내가 부모만 있었어도 이렇게는 안한다. 밉고 아픈 것도 내 자식인데, 밉고 아픈 부모 보내는 게 맞는가?"라 되받아친다. 손녀인 달리는 문 밖에 쪼그려 앉아 이 모든 말을 듣는다. 달리와 아픈 할아버지의 가출에 집안의 싸움은 온전한 답을 내지 못한 채 멎는다.

몇 개월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은 짐 정리를 위해 집을 다시 찾는다. 무대 위 난초에는 노란 꽃이 피었다. 달리는 엄마와 아빠를 화해시키려 하고 엄마는 딸에게 이런 고백을 한다. "아빠보담 니가 내 첫사랑 아이가. 니가 엄마 하고 부르던 날, 초등학교 들어가던 날… 어찌나 감동이던지. 니 모든 게 궁금하고, 아직도 니를 보면 설렌다." 그 동안 집은 완전히 비고 달리는 텅 비어버린 집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리고 방안 구석구석을 누비며 추억을 회상한다. 거기서 있었던 가족들을 떠올리며 홀로 대화를 나눈다. 선으로만 나뉘었던 공간에 빛이 번진다. 달리는 떠나고 마침내 집은 벽 없이 하얀 공간이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아 말한다. "자식이 곁에 있어야 좋은기라."

아직 때는 늦지 않았다

뜨거운 인기로 일찌감치 마감된 공연이 있지만 취소표가 나오면 다시 예매할 수 있고 19일 오후 3시에 열리는 연극 연출가 오태석씨의 '극작가 마스터클래스'와 23일 오후 3시에 펼쳐지는 연출가 백석현의 '립笠명鳴!'은 추가 좌석을 배정해 아직 여유분이 있으니 서두르면 좀 색다른 공연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만약 창작의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남산예술센터에는 상시투고 시스템인 '초고를 부탁해!'가 있기 때문이다. 장막 희곡을 집필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이 프로그램은 극작가 또는 극작 지망생들이 자유 주제의 미발표 창작희곡을 초고단계에서 투고하면 드라마터그 독회-품평회를 통해 낭독공연으로 공연예술관계자, 기획자, 일반관객에게 선보여진다. 드라마터그는 작품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관련 이론 등을 점검해 연출가, 극작가, 배우 등이 자신의 의도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다. nswriting@sfac.or.kr로 상시접수가 가능하다. 관람과 창작으로, 희곡과 친해져보시길! 일상에 깊이가 생길 것이다.

- 공연 예매 : http://www.nsartscenter.or.kr/Home/Perf/PerfSale.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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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공연 #남산희곡페스티벌 #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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