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선생을 아시나요?

시민리포터 이승철

발행일 2012.11.19. 00:00

수정일 2012.11.19. 00:00

조회 3,768

[서울톡톡] 북한산 둘레길은 힘들게 걷는 길이 아닌, 주변의 아름다움을 둘러보며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멋진 길이다. 더구나 우리 역사의 어두운 고갯길에서 등불이 되었던 선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애국지사들이 잠들어 있는 '순례길 구간' 중 의암 손병희 선생 묘역을 향해 왼편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서라벌 중학교 쪽으로 가는 중간 길이 나있었다. 걷다보니, 서라벌 중학교 후문 앞에 소나무 숲에 감싸인 아늑한 묘역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몽양 여운형 선생의 묘역이다.

묘역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철제대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접근이 쉽지 않다. 묘역입구 문설주에는 '몽양 여운형선생 묘소'라고 한문자로 쓴 글씨만 선명하다. 근처를 지나던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왼편으로 돌아가면 묘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고 한다. 주민의 말대로 왼편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허리를 굽히고 들어 갈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가을 햇살이 눈부신 묘역에는 무덤 앞에 상석이 하나 놓여 있고, 검은 색 비석 하나가 서있을 뿐 정문의 엄중함과는 달리 조금은 초라한 모습이다. 그러나 무덤 뒤편의 청청한 소나무들이 우람하고 당당한 모습이어서 무덤 주인의 풍모를 떠올리게 한다.

몽양 여운형선생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아버지 정현과 경주이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함양이고 아호가 몽양이다. 대대로 지주 집안인데다 아버지가 부농이어서 가정형편은 넉넉했다. 그는 14세 때 용인의 유씨 처녀와 결혼했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씨 처녀와 재혼했다.

경기도 양평 부잣집에서 태어난 소년, 노비들을 해방시키다

배재학당에서 교육받은 영향으로 1907년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어 성경공부를 시작한 그는 1909년에는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광동기독학교를 세워 교육에 뜻을 두었다. 또한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기독교 정신에 따라 가정의례 전통을 혁신하고 집에서 부리던 노비들을 불러 모아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풀어주는 등 안팎으로 변혁을 일으켜 세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1911년 평양장로교신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중이던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의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 중퇴했다.

일제는 1919년 3월 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한 몽양선생을 회유하려했으나, 장덕수를 통역관으로 내세운 그는 일제의 조야 인사들에게 오히려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이후 소련공산당과 중국국민당에 차례로 가입한 후, 혁명군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고, 1933년부터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에 앞섰다. 이듬해 조선 체육회장에 취임했으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선수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신문도 폐간 당하고,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일본의 패전을 직감한 몽양선생은 1944년 '조선건국동맹'이라는 전국적인 지하조직과 농민동맹을 조직했으며, 드디어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조국이 해방되자 안재홍, 정백 등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고,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스스로 부주석에 취임했다.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꿈꾸었던 독립지사, 극우 테러리스트의 총탄에 희생당하다

순탄하게 모든 것이 이뤄지는 것 같았으나, 몽양선생의 공산주의 노선은 상하이임시정부 지사들과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또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도 내부적으로 박헌영이 주도하는 극좌세력과 대립하는 내분에 휘말렸다. 9월에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은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그해 12월 몽양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으나 정책과 노선이 명확하지 않아 조직을 장악하지 못하고 반대파 극좌익세력에게 밀려 탈퇴했다. 극좌와 극우 양쪽 진영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1947년 7월, 혜화동에서 극우파의 지령을 받은 청년 한지근(이필형)이 쏜 총탄에 암살당했다.

일제에 맞서 싸웠고, 상하이 임시정부 요직을 역임한 독립지사이며,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자였던 몽양선생은 덴마크체조를 우리 국내에 처음으로 보급한 체육인이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했으며, 2008년 2월에 다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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