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떨어 독립운동에 쓰다
발행일 2012.09.06. 00:00
[서울톡톡] 북한산자락을 휘감고 도는 둘레길 중 '순례길 구간'에서 김창숙, 양일동 선생 묘역으로 오르다보면 오른편으로 오르는 작은 샛길이 나타난다. 그 샛길 왼편에는 한문으로 '동암서상일선생묘소입구'라 쓰여 있는 작은 사각형의 화강석 표지석이 서있다. 묘역으로 가는 길은 산자락을 타고 비스듬히 나있는 비좁은 오솔길이다.
둘레길 입구에 서있는 안내판에는 '애국선열 서상일 선생, 경북 대구출신 독립운동가 정치가였으며 1909년 나라의 권리를 다시 찾기 위하여 대동청년당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1910년 일본에게 우리나라 통치권을 빼앗기자 이를 되찾기 위해 광복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1915년 명절을 기리는 글짓기를 한다며 일본경찰들을 속이고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으로 헌정의 초석을 놓았다'라고 쓰여 있다.
경사가 완만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한참을 걸은 후에야 동암 선생의 묘역이 나타난다, 근처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고 왼편 제법 넓은 공터 안쪽에 선생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묘역 풍경은 무덤 앞 양쪽에 망주석 두 개가 서있을 뿐 주변에는 별다른 석물이 보이지 않아 조촐하고 고즈넉한 모습이다.
서상일 선생은 1887년(고종 24)에 대구에서 태어났다. 호는 동암이며 본관은 달성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보성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했다. 졸업 후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23세이던 1909년 대구지역 유지였던 안희제, 윤병호, 김동삼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만들어 지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답과 재산을 처분하여 대구에 조양회관을 세웠는데, 이곳이 바로 대구지역 항일문화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건물은 서구식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세웠는데 '조양회관'이라는 이름은 '아침 해가 비치는 곳' 즉 '해방의 아침을 맞이하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라고 한다. 당시 1000명을 수용할 정도로 규모가 큰 대강당을 갖춘 조양회관에서는 수많은 청년학생들에게 민족사상 고취를 위한 은밀한 교육이 시행되었다.
사재를 털어 조양회관을 세우다
이곳에서는 최남선의 조선사 강좌와 한글교육 등 조선의 정신을 높이는 각종 교육과 행사가 열렸다. 지역사회단체인 대구구락부와 운동협회, 청년회, 신간회대구지부 등 사회단체들도 자리 잡아 은밀한 연대가 이루어져 매우 효과적으로 활동했다. 이런 활동은 선생이 대구를 떠난 후에도 이어졌다.
선생은 또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자 '9인결사대'를 조직했다. 결사대는 우리민족의 확고한 반일의지를 담은 선언문을 작성하여 서울에 있는 각국 공사에게 돌린 뒤 모두 할복자살 할 것을 계획했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1913년에는 대구에서 박상진 등과 함께 광복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사업을 벌였다, 2년이 지난 1915년에는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활동했으며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만세운동 때는 대구에서 참가했다. 그의 항일운동은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이론만의 항일이 아니라 무력항쟁도 병행했다. 실제로 1920년에는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해 일제의 관서들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21년 8월에는 미국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보냈는데, 이 청원서에 동지들을 대표하여 서명했다. 항일운동에서는 절대 뒤에 물러서있지 않고 항상 앞장서는 그였다. 1924년엔 '농림'과 '민중운동'이란 계몽잡지를 발행하기도 했으며, 무정부단체인 '흑우회' 계통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주로 국내에서 활동했지만 한 때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은 해방정국에서는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여 정치에 참여했다. 한민당 총무와 국민대회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직책을 맡기도 했으며, 1946년에는 비상국민회의 의원에 선출되었고,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민선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헌법기초위원으로 우리나라 헌정의 초석을 놓다
선생은 1948년 국민들의 직접투표로 5월 31일 구성되어, 1950년 5월 30일까지 활동한 제헌국회(제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우리나라 헌정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1950년 제헌국회 말기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발기하여 최초의 개헌안을 상정하기도 했다.
1950년대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활동을 했는데 1956년 3월 31일 진보당전국추진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 대표자회의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는 선생이 지명되었으나 극구 사양하여 박기출로 바뀌었다. 선생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활동했었다.
1960년에는 사회대중당을 창당해 대표총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60년 제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61년 그가 몸담고 있던 사회대중당이 파벌이 생겨 분열되자 재야 혁신세력을 정비하고 결집하여 통일대중당을 발기했으나 5·16으로 무산되었다.
선생은 75세였던 1962년에 지병이 악화되어 별세했다. 역사의 소용돌이가 심했던 격변기에 태어나 항일운동과 정치활동으로 한시도 한가한 삶을 살 수 없었던 일생이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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