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양일동,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이승철

발행일 2012.08.30. 00:00

수정일 2012.08.30. 00:00

조회 2,711

[서울톡톡] 1929년 12월, 날씨는 춥고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그렇잖아도 가난에 찌든 조선인들의 삶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가중되었기 때문이다. 일제 총독부 경무국에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정보가 속속 입수되고 있었다. 지난 달인 11월 초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일제 총독부 경무국과 경찰서들은 날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3년 전인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상왕, 왕, 왕세자, 왕세손과 그 비들의 장례)일에 맞추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만세운동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저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젊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날 기세라 했다. 총독은 "경찰이 사전에 철저히 차단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삼엄한 일제경찰의 감시와 눈을 피해 12월 2일 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학생비밀결사조직인 '학생전위동맹'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이들은 서울지역 학교들에 조직된 독서회와 청년단체 등을 통해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전국의 학생들과 민중들이 총궐기하자는 전단지 격문을 만들어 살포했다.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남의 일처럼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이 주동학생들의 생각이었다. '우리들도 일제에 맞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자. 조국의 광복을 위해 우리 젊은 학생들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학생들 중에 양일동이라는 학생도 끼어있었다. 중동중학생이었다.

학생들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12월 5일 경성제2고보(지금의 경복고)의 동맹휴교를 시작으로 경성제1고보(지금의 경기고), 중동, 경신, 보성, 중앙, 휘문, 배재, 이화, 동덕, 협성실업 등의 학교 학생들이 뒤를 이었다. 드디어 12월 9일, 경신과 보성, 중앙, 휘문, 협성학교 등의 학생들이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는 13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서울에서 1만2,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했고 그들 중에 1,400여 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항일 학생운동에 앞장섰다가 퇴학당하다

'지난 3일 오전 11시경에 경기도청 학무 당국에서 시내 중앙, 배재, 중동학교 등 여러 사립 중등학교 교장을 전부 도청으로 불러 놓고 학생훈련을 잘못 시켰다고 추궁하며, 이번 만세 사건에 관계된 학생 전부에게 퇴학 또는 무기정학, 유기정학 등 가혹한 처벌을 단행하라는 명령을 하였는데, 진퇴유곡인 각 학교 당국에서는 5일부터 수십 명에게 무서운 처치를 내리게 되었다더라.'(당시 동아일보 기사)

중동중학교 양일동 학생도 그렇게 퇴학당했다. 일제식민 치하에서는 독립투사였고 해방된 조국에서는 정치가였던 현곡 양일동 선생은 1912년 12월 30일 전북 옥구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동중학교 학생시절에 광주학생의거에 동참하여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퇴학당하고 1933년에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중동중학교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하여 도중에 그만 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북경에 있는 민탁고등학교에 입학한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했다. 그리고 고국에서의 학생운동 경력과 조국의 해방을 위한 뜨거운 열정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경에 체포돼 혹독한 옥고를 치르는 동안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수형생활 2년 8개월 만에 신병으로 가석방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해방될 때까지 농촌계몽운동에 매진했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자주정부 구성을 위한 정치활동이 시작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946년 2월 1일부터 이틀간에 걸쳐 정부수립문제를 논의한 비상정치회의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후 그는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고,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까지 5선 의원을 지냈다. 그러나 그의 정치역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두 번의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정지당했고, 1967년에는 '정치정화법', '반공법' 등의 위반으로 투옥되었다.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자락 '순례길 구간' 둘레길에서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역 입구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개울가에 있는 체육시설 쉼터 건너편에 '현곡 양일동 선생'묘역 입구가 나타난다. 선생의 묘역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돌층계가 놓여있다. 묘역풍경은 다른 애국선열들의 묘역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묘역 아래쪽 길가에는 '교육은 민족의 영속적 발전의 원동력이고 문화는 그 아름다운 꽃이요 열매이다. 비록 시운의 변동에 따라 정권에 존망이 있을지라도 민족의 생명은 멈추어질 수 없고 교육과 문화가 정체될 수 없다.(민주통일당 반유신 투쟁사)'는 어록판이 세워져있다.

이정표 표지를 따라 올라가노라면 묘역 입구에 '애국선열 양일동 선생. 전북 옥구출신 독립운동가 정치가였으며 중동학교를 다니던 중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다 학업을 그만두게 되었고,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연맹과 조선동흥노동연맹에 가입하여 각종 출판물을 통해 항일의식을 높이는데 노력하였다. 광복 후 제3·4·5대 민의원 및 8·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는 안내판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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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순례길 #만세운동 #현곡양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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