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경력과 사상의 아나키스트
발행일 2012.08.20. 00:00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나의 이상은 강제 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아가서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 하에서 다 같이 노동하고 다 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단주 선생이 해방된 조국에 귀국하여 첫 번째로 한 말)
'무정부라는 말은 아나키즘(anarchism)이란 그리스말을 일본 사람들이 악의로 번역하여 정부를 부인한다는 의미로 해석 한 것 같다. 그러나 본래 'an'은 없다는 뜻이고 'archi'는 우두머리, 강제권, 전제 따위를 의미하는 말로서 'anarchi'는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강제적 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정부(heteronomous government)를 배격하지, 자율정부(autonomous government)를 배격하는 자가 아니다' (단주 유림 선생의 어록에서)
북한산 둘레길 중 수유동 일대의 '순례길 구간'에서 만난 애국선열들 중에서 아주 특별한 경력과 사상을 가진 이를 만날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단주 유림 선생이다. 성재 이시영 선생의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와 골짜기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아주 예스러운 '섶다리'를 건너게 된다.
예스러운 섶다리 건너편에서 만난 아나키스트
섶다리는 통나무와 소나무가지, 진흙으로 만든 '임시 다리'로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묻어나고 소박한 정감을 느낄 수 있는 다리다. 옛날에 강이나 개울을 사이에 둔 마을주민들이 서로 왕래하기 위해, 매년 물이 줄어든 겨울 초입에 만들어 여름철 불어난 물에 떠내려 갈 때까지 사용했었던 다리다.
골짜기 아래쪽으로 만들어진 섶다리를 건너, 다시 왼편 개울을 건너는 섶다리와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면 다리 끝 왼편에 안내판이 서있고, 맞은편에 유림 선생의 검은색 묘비가 돌거북 등위에 세워져 있다. 선생의 묘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완만하게 오르는 20여 개의 돌층계를 올라, 다시 20여 미터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 입구 안내판에는 '애국선열 단주 유림(1894,5,23~1951,4,1) 경북 안동출신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정치가였으며 강제적 권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트가 되어 1929년 평양에서 최초의 아나키즘 전국조직인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원(현 국회의원)과 국무위원을 맡았으며 광복 후에는 아나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동당을 창당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anarchist)라고 하면 아무래도 선뜻 떠오르는 인물이 단재 신채호 선생과 박열 선생일 것이다. 그러나 무정부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정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한 사람은 단주 유림 선생이 세계 최초의 인물로 꼽힌다. 그럼 단주 유림선생은 어떤 인물일까?
구한말인 1894년에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계곡마을에서 중소지주였던 아버지 유이흠과 어머니 김성옥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난 유림 선생의 본관은 전주, 호는 단주, 본명은 유화영이다. 선생은 다섯 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서당에서 교육을 받아 아홉 살 때 사서삼경을 익혔다고 한다. 그 후 경북 북부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에서 수학했다.
어린 나이에 혈서를 쓰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소년
단주 선생이 독립운동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때였다. 경술국치의 소식을 들은 선생은 손가락을 칼로 베어 흐르는 피로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고 혈서를 썼다한다.
선생은 협동학교를 졸업한 이후 1919년 3·1운동 때까지 대구와 안동을 오가며 계몽운동과 항일비밀결사 조직에서 활동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안동의 임동면 편항 장터 시위에 가담했다. 3·1운동을 겪으면서 해외 망명을 준비한 선생은 우선 가산을 정리한 뒤 가족을 동반하고 망명길에 올라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그는 1911년에 먼저 망명한 이상룡, 김동삼 등 안동 출신의 스승과 선배들을 만난다. 그들은 이회영을 비롯한 신민회 사람들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부민단, 서로군정서로 연결된 항일조직을 결성하여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에 남아 있던 나머지 재산도 모두 처분했다.
그러나 그는 서로군정서에서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곳을 떠났다.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경신참변이 일어나기 직전에 그곳을 떠난 것이다. 1920년 여름 그는 공부를 하기 위해 상하이로 옮겼다. 그곳에서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북경으로 다시 옮겼다. 북경에서는 단재 신채호와 김창숙을 만나 신채호가 주관하던 잡지 '천고'의 발행을 도왔다. 이 시기가 그에게 아나키스트 활동을 모색하고 있던 단재선생으로부터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상하이와 북경에서 활동하는 동안 당초 목표했던 학문연마의 길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그가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하면서 스스로의 학문적 깊이에 대한 미흡함과 성숙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선택한 대학은 중국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사천성 성도에 있는 성도대학이었다.
성도사범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한 후에 프랑스로 유학하겠다는 목표까지 세웠다. 성도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하는 동안 프랑스어를 선택 수강했으며, 중국정부의 학자금 지원도 받는 등 상당히 구체적인 유학준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구열이 유난히 강했던 그는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 등 다른 외국어와 에스페란토어에도 능숙했다고 한다.
성도대학을 졸업한 선생은 프랑스 유학이 여의치 않자 다시 만주지역으로 활동지역을 옮겼다. 그리고 1929년 11월 전라도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일제 경찰에 쫓긴 상당수의 학생들이 만주로 탈출해 왔다. 선생은 이때 4백여 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모아 의성학원(봉천중학)을 설립했으며 직접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세계 최초 아나키즘 정당을 설립하다
의성학원 운영에 여념이 없던 선생은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직후인 1931년 10월 초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연맹을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죄목이었다. 선생은 '원산흑색사건'주동자들이라는 죄목으로 이홍근, 최갑룡, 임중학, 강창기, 안봉연 등과 함께 함흥지방법원 재판에 회부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항소했으나 경성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37년 10월 8일 출옥했다.
서대문형무소의 수형생활은 혹독했다. 그러나 선생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출옥 후 선생은 곧 2차 망명길에 올랐다. 1937년 10월 말경이었다. 이 시기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3개월이 지난 무렵이었다.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투쟁은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만주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낀 선생은 1942년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향했다.
임시정부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선생은 민족적 당면과제인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과, 우리민족의 자율적 기관은 임시정부라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선생의 임시정부 참가는 아나키즘의 변화된 의식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선생의 아나키즘은 일제라는 강압적이고 태생적으로 잘못된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었지,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생은 임정에서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위원, 선전위원회 위원, 건국강령수개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모든 독립운동의 역량을 임시정부로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45년 12월에 귀국할 때까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44년 4월부터 이듬해 12월1일까지 무임소 국무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2월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선생은 통일정부 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비상 국민회의가 대한국민의회로 개편되면서 부의장에 피선되었고, 미·소 공동위원회 민주의원, 입법의원 등을 반대했다.
전국 아나키스트 대회의 결의에 의해 노동자, 농민과 일반 근로대중을 근간으로 하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독립노동당'을 창당하고 당수에 뽑히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아나키즘 정당이었다. 세계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아나키즘 이론가라면 피에르 조셉 프루동, 막스 슈티르너, 레오 톨스토이, 윌리엄 고드윈, 허버트 리드, 미하일 바쿠닌, 페테르 크로포트킨 등이 있지만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정당을 설립한 사람은 없었다.
선생은 노농신문을 창간하여 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 보호에 힘쓰며 몇 번의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선되지 못했고, 1961년 4월1일 6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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