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서울을 느끼고 싶다면...
발행일 2011.11.21. 00:00
어느 해보다도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이번 가을. 짧게 스쳐지나가는 가을을 잠시라도 잡아둘까 싶어 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에 내려 충정각을 둘러 보았다. 미동초등학교, 푸른극장 등을 떠올리게 되는 충정로역 주변은 마포에서 서대문을 거쳐 종로로 나가는 길목이다. 높은 건물들이 지금처럼 많지 않던 1980년대만 해도 이곳을 지날 때면 주변의 낮은 집들 사이로 종근당 건물이 홀로 우뚝 서 눈에 띄었다. 예전에 버스를 타고 자주 오가던 길이었는데, 오랜만에 와보니 곳곳에 들어선 빌딩숲이 새삼스럽다.
비록 빌딩들 사이에 잔뜩 웅크리긴 했지만 주황색 종근당 빌딩도 여전하고, 초록색 옷을 입은 충정아파트도 마치 옛날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건너편은 높은 빌딩들이 키 재기를 하고 있지만, 충정아파트가 있는 쪽은 그래도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그렇게 예전 기억을 더듬어가며 걷다 보니 충정각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그 표시를 보고 들어서면 주변 집들과는 다른 분위기의 붉은 벽돌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대안전시공간 충정각이다.
충정각은 서울에 몇 남지 않은 근대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한 때는 벨기에 영사관이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 개인 소유 주택으로 쓰였다고 한다. 정확한 건립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두연이라는 사람이 소유하다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 8월 2일 고두권이라는 이가 매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함께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1910년 즈음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 건물은 서울에 몇 남지 않은 귀한 근대건축물이어서 그 의미를 더한다. 한때 재개발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충정각은 그 가치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에 의해 다행히 보존되었고, 현재 레스토랑을 겸한 대안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때로는 회화작품, 때로는 설치미술 등 다양한 표정의 전시가 이어지고 있어 찾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것도 이곳의 매력이다. 11월 23일부터 12월 9일까지 화가 전지연 개인전이 펼쳐진다. 관람료는 무료.
독일인 건축가가 지었다는 이 건물은 한국식과 일본식, 유럽식이 뒤섞여 묘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삼각형, 사각형에 팔각형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붉은 벽돌 건물이다. 팔각형 바탕에 삼각뿔지붕을 얹고 있는 기둥 형태의 입구에는 격자창과 담쟁이덩굴이 아담하게 잘 어우러져 있다. 그 시대에는 흔치 않았을 테라스와 장독대가 있는 뒷마당,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석물도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미로찾기라도 하듯 작은 방들이 이어진다. 통으로 탁 트인 실내도 좋지만, 이렇게 올망졸망 작은 방이 연이어 나타나는 것도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좋다.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숨어있는 계단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가보면 다락방 분위기가 나는 2층이다. 이곳에서 건물 보수공사 때 옛날 매매계약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집안 구경을 마치고 마당으로 나가보면 다른 구경거리가 또 가득하다. 마당 벽면으로는 먼지 쌓인 와인병들이 또 하나의 벽을 이루고 있어 방문객의 시선을 끈다. 은행잎 가득한 뒷마당에서는 따뜻한 담요 한 장 두르고 차 한 잔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을 듯하다. 여름이면 한쪽 구석에 있는 해먹(기둥 사이나 나무 그늘 같은 곳에 달아매어 침상으로 쓰는 그물)이 좋은 휴식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니 문득 이 곳의 여름 풍경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충정각을 돌아보고 혹시 시간 여유가 된다면, 주변 골목을 서성거려 봐도 좋다. 수십 년 세월이 그냥 비껴간 듯, 어릴 적 놀던 골목길이 이곳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소꿉장난하기에 딱 좋은 누구네 집 대문 앞이나, 동네 입구의 구멍가게, 골목과 골목을 이어주는 작은 계단까지… 서울에 아직 이런 곳이 남아 있었나 싶어 잠시 상념에 젖어든다.
한 자리에서 35년을 넘게 계셨다는 구멍가게 할머니는 주변 집들이 이젠 식당으로 변했다고 푸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빌딩숲 속에 살고 있는 도시인의 눈에는 어릴 적 살던 골목을 생각나게 하는 추억의 길이 그저 반갑기만 하다. 조금 더 지나면 매서운 바람에 여유롭게 산책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바쁜 일상 때문에 멀리 여행갈 시간을 내기 힘들다면, 주변의 가까운 곳을 찾아 스쳐지나가는 가을을 잠깐 잡아보는 것은 어떨까? (문의 : 02-363-2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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