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그 과거로의 여행

김상욱

발행일 2011.05.16. 00:00

수정일 2011.05.16. 00:00

조회 2,906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서울은 옛것을 헐고 그 자리에 빌딩을 올린다거나,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몇 개 놓였는지를 선진화의 척도로 삼고 자랑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300년, 400년 전에 지은 저택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뽐내는 유럽의 도시를 부러워하곤 했다. 그러나 25년 만에 찾은 서울에서 내 기억 속의 그곳이 아닌 다른 도시를 만났다. 서울의 본래 모습은 언제나 한결같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광화문을 지나 안국동, 가회동, 삼청동을 걸으며 100년, 300년, 그리고 600년 전 이 땅에서 살아간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북촌 한옥마을 골목을 걸으며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서울, 곧 서울의 인간 풍경(Humanscape)을 보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의 도시들, 그리고 그간 다녀본 전 세계 여러 도시와 비교하더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서울은 선조들이 역사의 유물을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쏟아부어준 도시라고 말이다. 과거 경제성장에 치우쳐서 잘 보존하고 관리하지 못했던 오래된 우리 문화의 흔적이 현재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는 노력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도시로 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번 방문에선 ‘쇼핑 천국, 서울’이라는 테마로 여행을 하려고 했다. 자원 부국 카자흐스탄에는 신흥 부자가 많고, 한류 드라마 <대장금> 덕분에 최근 한식의 인기가 높다. 그래서 열심히 한식당을 찾아다니며 취재를 했다. 그러다 문득 “서울 사람들이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라고 말하던 김 로만 우헤노비치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순간 아차 싶었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보다는 카자흐스탄인들이 갖지 못한 600년 고도 서울,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룬 서울의 참 모습을 알려야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마침 안국동에서 점심 약속이 있던 터라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헌법재판소에 근무하는 친구와 점심을 먹은 후 그 건물 옥상에 있는 하늘정원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가까이에서 북악산을 마주하는 호사를 누렸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삼청동, 가회동, 일명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내가 살고 있는 알마티도 공원 속에 도시가 들어섰다고 할 정도로 가로수와 숲이 많은데, 서울은 자연이 만들어준 낮은 산과 나무 덕분에 알마티보다 더 많은 숲을 안고 있었다. 나는 미국으로 발령을 받아 곧 한국을 떠날 친구에게 “서울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처음 알았다. 기억 속에 잘 담아 가라!”라는 말로 작별 인사를 한 뒤 헌법재판소를 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조금 전 하늘정원에서 본 그 동네로 향했다.

5분 정도 걸어가자 ‘북촌문화센터’가 눈에 들어왔다. 본래 조선시대 말기 세도가의 집으로, ‘민 재무관 댁’으로 알려진 이곳은 한옥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뒤 행랑채였던 홍보 전시관에선 북촌의 역사와 가치를 알리는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홍보 전시관을 둘러보고 ‘북촌 관광 안내도’와 ‘도보 여행 셀프 가이드북’을 얻어 본격적으로 북촌 나들이를 시작했다. 북촌 한옥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니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기와를 얹은 한옥 지붕과 담장, 대문이 잘 조화를 이룬 한옥 사이사이에 놓인 예쁜 화단이 손님을 반겼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넘어와 있는 듯했다.

경사진 골목길 양쪽으로 한옥이 촘촘하게 늘어선 가회동 31번지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감탄사를 터뜨리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평일 오후인데도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 관광객이 무척 많았다. 문득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던 중에 들른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가 떠올랐다. 실크로드의 중심 도시 사마르칸트보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옛 성터와 그 아래에서 400~500년 전과 똑같이 과일과 야채, 옷감을 사고파는 시장(바자르)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던 부하라.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해볼 수 있는 유일한 도시가 바로 부하라라고 소개하며, 우즈베키스탄에 가면 반드시 이곳을 여행해보길 권해왔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도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북촌은 수백 년의 시간을 머금은 채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이다.

사실 북촌을 여행하는 길은 네 갈래가 있다. 삼청동 길, 가회동 길, 계동 길 그리고 창덕궁 길. 어느 길을 먼저 가든 상관없지만 북촌을 충분히 감상하기 위한 시간만큼은 꼭 챙겨야 한다. 이 네 갈래 길을 모두 걸어 북촌을 감상하고 나니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100년, 200년 또는 그 이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을 둘러본 후 느끼는 뿌듯함, 그 이상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마도 북촌의 오늘 속에 살아 숨 쉬는 조상들의 혼과 지혜를 한 편의 역사 드라마처럼 반나절 만에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게다.

북촌 걷기를 마치고 인사동으로 접어들 때쯤 조그마한 아쉬움이 피어올랐다. 아무 집이나 대문을 쑥 열고 들어가보지 못한 아쉬움이었는데, 동시에 ‘북촌 주민들은 추운 겨울에 난방을 어떻게 할까?’, ‘만약 카자흐스탄에 한옥을 지으면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 ‘아파트 거실 대신에 전통 한옥 구조에 녹아 있는 조상의 지혜를 살려 마당을 거실로 활용할 수 있게끔 설계해봐야지!’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인사동에 들어섰다. 이제껏 떠올린 생각들은 잠시 접어두고 허기진 배를 남도 녹차 막걸리와 벌교 꼬막, 파전으로 채우며 그토록 그리워했던 서울의 향수에 젖어들었다.

 

■ 북촌문화센터는?

북촌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고 수준 높은 전통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한 곳으로, 2002년 10월 개관했다. 북촌문화센터는 본래 조선시대 말기 세도가의 집으로, ‘민 재무관 댁’ 혹은 ‘계동 마님 댁’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한옥 개·보수 기준 조례에 의거해 최대한 한옥 원형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뒤 행랑채였던 홍보전시관에서는 북촌의 역사와 가치를 홍보하는 자료를 전시한다. 북촌 보존의 중요성을 알리는 영상물을 상영하고, 북촌 곳곳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북촌 투어에 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북촌문화센터에서는 한문 서예, 실용 민화, 전통 다례, 매듭 공예, 전통 자수, 전통 보자기, 칠보, 전통 한지공예 등 전통문화 강좌를 열고 있으며 영화 상영, 연주회,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와 프로그램도 기획 중이다.

▶문의 http://bukchon.seoul.go.kr  / 전화 : 02-3707-8388·8270

글/김상욱(카자흐스탄 한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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