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배경 청계천

하치스카 미쓰히코

발행일 2011.04.25. 00:00

수정일 2011.04.25. 00:00

조회 2,864

오르막길을 더 올라 성곽 안쪽을 지키는 창의문으로 향했다. 창의문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풍경과 산의 능선으로 펼쳐지는 성곽은 그야말로 만리장성과 같은 절경이다. 녹색 자연이 가득한 성곽 도시 서울의 아름다움을 실감할 수 있다. 인왕산 성곽 길을 조금 더 따라가면 왼쪽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보인다.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하면서 조선의 독립운동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국민적 시인이다.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다닌 그는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소설가 김송의 집에 하숙할 당시 이 부근을 산책하면서 시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곳엔 유명한 ‘서시’의 시비가 서울을 내려다보듯이 세워져 있다. 언덕을 오르는 길의 말뚝이나 손잡이에도 그의 대표작인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 등의 시가 먹으로 쓰여 있다. 그의 시를 한 구절 한 구절 읽어내리며 산책하다 보니 자그마한 전망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은 웅장하면서도 아름답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나오는 대부분의 시가 이곳에서 쓰였다고 하니 말 그대로 ‘시인의 언덕’이다.

자하문 길을 따라 쭉 남쪽으로 내려간다. 자하문 길에서 사직로 맞은편에 보이는 우리은행 골목으로 들어가면 한자로 ‘효자서당’이라고 쓰여 있는 작은 한문 학원이 나온다. 이상이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이곳에 이상의 기념관을 만들 계획이라는 말이 들린다.

광화문을 지나 청계천의 시작점인 청계광장으로 향한다. 청계천 하면 떠오르는 것은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천변풍경>이다. 박태원은 이태준의 권유로 모더니즘 작가들의 모임인 ‘구인회’에 가입했으며, 표현의 기교를 갈고닦은 예술파 작가로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대표작이다. 그러나 해방 후 그는 이태준을 따라 월북했다.

<천변풍경>은 주로 서민이 살던 청계천 주변이 그 무대로,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서 사람들의 애환을 생기 있게 그린 1936년의 리얼리즘 소설이다. 강에서 빨래하는 여자들의 소문에서 비롯된 드라마가 다양한 등장인물에 의해 전개된다. 특정 주인공은 없지만 등장인물은 모두 강변에 사는 서민들이다. 고도성장과 함께 과거의 청계천은 한때 콘크리트로 메워져 도로 밑의 속도랑이 되었으나 다시 개천으로 복원된 덕에 현대판 <천변풍경>이 되살아났다.

소설의 무대가 된 광통교에서부터 수표교까지 강을 따라 걸어보았다. 광통교는 청계천 최대의 돌다리다. 그 길 도중에 만날 수 있는 한국관광공사가 자리한 곳에서 박태원이 태어났다고 한다. 수표교는 세종대왕 시대에 만든 돌다리로 수심을 재기 위한 수표석이 옆에 세워져 있다. 당시의 돌다리는 1959년에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장충동공원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수표석은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목재로 복원된 수표교를 건너가며 <천변풍경>에 그려진 활기차고 소박한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이상 역시 구인회 회원이었는데, 9인의 작가 중 박태원과 이상만이 서울 토박이여서 이 둘은 특히 더 사이가 좋았다. 둘이 함께 찍은 사진도 남아 있으며, 이상이 세상을 떠났을 때 박태원이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의 글을 남겼다고 한다.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낸 다방 ‘낙랑파라(樂浪parlour)’가 있던 소공동이나 한때 이상이 경영했다고 하는 ‘제비다방’이 있던 피맛골도 이 청계천 일대다. 청계천에서 떨어져 북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3·1운동이 처음으로 일어난 역사적 장소인 ‘탑골공원’이 나온다. 지금은 주로 노인들이 모여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는 휴식의 공간이지만, 항일운동의 상징인 이 공원 안에는 한용운의 석비 ‘용운당대선사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의 생애와 투철한 민족정신을 기리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한국 문학의 뿌리가 된,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작가들은 이렇듯 아름다운 산과 성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자연과 풍경을 나름대로 사랑하면서 불굴의 정신으로 열정이 깃든 활동을 펼쳐왔다.” 서울 곳곳에 남겨져 있는 한국 문학의 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문학 세계를 만나고, 그들의 정신과 열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여행이 되었다.

글/하치스카 미쓰히코(광고 회사 ADK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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