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깔리면 미술관이 살아난다

시민기자 이은자

발행일 2010.10.07. 00:00

수정일 2010.10.07. 00:00

조회 2,811


아직도 여름 기운이 남아있는 것 같지만 밤공기는 깊은 가을이다.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인 ‘미디어시티서울 2010’을 관람하기 위해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들어서던 날이었다. 입구에서부터 평소 접하지 못했던 작품들이 시선을 끌었다. 미술관 광장과 정원 곳곳에 설치된 작품들은 하나같이 다가가게 하고 말을 걸게 하고 한참을 서있게 하는, 늦가을의 정취에 어울리는 아주 따뜻한 작품들이었다. 미디어시티서울을 빛내주려는 일종의 꾸미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11명의 국내작가가 참여한 ‘서울시립미술관 가을야외전시 - 아날로그의 숲 ’이었다.

미술관 안팎에서 동일 시간대에 열리고 있는 삭막한 디지털 아트와 감성적인 아날로그 아트의 세계가 참 흥미롭고 신선하다. 미술관 입구 가까이 맨 처음 등장한 작품은 이규민의 ‘꿈꾸는 달팽이’. 이규민은 작은 생물들에 대해서 깊이 관심 갖고 주목해온 작가인데, 어느 여름날 집 앞을 지나는 조그만 달팽이에 이끌려서 풀과 채소를 깔아주고 기른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의 달팽이 작업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달팽이 껍질 위에 예쁜 색과 장식을 넣어 엄마와 아이, 부부, 형제, 자매로 가족을 이뤄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는 모습들, 아기 달팽이, 나들이 나온 달팽이 가족, 입맞춤을 하는 연인들, 한 방향으로 향하는 무리 등의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달팽이 작품을 많이 제작해 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달팽이 한 마리의 출현에도 놀라며 호들갑을 떠는데 이렇게 사랑스런 작품으로 탄생될 수 있다니! 사물을 바라보는 따스한 가슴과 눈길이 바로 멋진 예술의 세계를 가능케하는 것이 아닐까.  



신현준의 ‘꿈 - 평안을 위하여’는 정말 평화로워 보이는 작품이었고, 김영원의 ‘그림자의 그림자’와 이용덕의 'Walking Lady in Blue'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체험을 하고 있었다. 특히 'Walking Lady in Blue'는 얼굴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사진으로는 작품 효과를 알아볼 수가 없고 실물 앞에 꼭 서 봐야 한다. 권치규의 ‘빛’을 지나 김무기의 ‘중얼거리는 나무’ 앞에서는 한참 서 있었다. 마치 설거지할 때나 빨래할 때, 걸어가면서도 혼잣말을 해대며 잘 중얼거리는 펑퍼짐한 주부의 자화상 같았기 때문이었다. 작가에게는 누가 되는 엉뚱한 발상일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작가는 인간의 실존과 허무를 스테인레스 철사를 용접하여 구축한, 한 그루 나무에 투영해 봤다고 한다.

이근세의 ‘수면양(sheep - sleep)'은 아마 알파벳 하나 차이의 단어가 주는 뉘앙스 때문에 작품구상이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원재의 ’Memory 1975 sep', 이웅배의 ‘공동체’는 마치 어린이 놀이기구 같아서 아이들이 올라타고 만지작거리기도 하였다. 김원의 ‘묵상’은 종교적인 냄새가 진하게 배어들어 바라만 보고 있어도 차분히 성찰의 시간이 되는 작품이었고,  김경민의 ‘휴식’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런 포즈를 취해보고 싶게 하기도 해 많은 사람들이 작품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정말 편한 자세다. 

11명의 참여작가 중 권치규와 김경민 씨는 부부 조각가라는 사실도 알았다. 김경민은 여성작가 특유의 감각으로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는 내용들을 해학적이면서도 풍자적인 구성으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해 왔는데, 작품 속에 표현되고 있는 인물들이 주로 작가의 가족이라고 한다. 세 자녀의 엄마로서 가사생활과 육아의 체험들이 그대로 작품으로 표현돼 있어 마치 동화 같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 권치규의 작품 세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라고 한다. 전시 때마다 전시장 안에 하나의 집을 지어놓은 것 같은 대형 작품에 작가의 표현내용이 잘 압축되어 있다고 한다.



서울시립미술관 유희영 관장은 본관 앞마당에서 펼쳐지는 설치전시 ‘아날로그의 숲’展은 가족 단위 및 다양한 계층의 관람객에게 예술작품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시민들에게 확장된 전시공간에서 재미있고 편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아날로그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감성이 차분해지는 가을을 맞아 명상과 사색, 추억과 향수, 위로와 격려와 같이 인간의 감성에 온기를 불어넣는 아날로그적 소재를 통해, 속도와 기술이 지배하는 첨단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지친 삶의 구조를 위로하고자 한다고도 했다. 그런 취지에 손색이 없는, 따뜻한 작품들을 크리스마스나 연말까지 전시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면 더욱 걷고 싶은 정동길 나들이로 ‘디지털과 아날로그’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 좋겠다. 

관람을 마치고 늦은 시각 귀가길에 많은 생각들을 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둘의 관계는 나란히 끝없이 달려가는 철길과 같고, 두 개가 반드시 있어야 유용한 젓가락 같은 것이 아닐까. 아무리 최첨단의 것들을 수용하고 사는 세상이라 해도 아날로그는 그 이상의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아날로그의 숲’ 관람 안내

전시기간 : 11월 7일까지
관람시간 : 종일 관람 가능(휴관일 없음)
문의전화 : 02) 2124-8981 또는 다산콜센터 120

#아날로그 #시립미술관 #가을야외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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