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놓치면 2년을 기다려야 하는 전시

시민기자 최근모

발행일 2010.09.13. 00:00

수정일 2010.09.13. 00:00

조회 3,652

회사원 장씨는 해외 출장을 갔다. 아내가 만삭의 몸을 이끌고 공항까지 함께 했다. 외국에서 출산 소식을 들은 장씨는 수화기 너머로 우렁차게 우는 아기의 목소리를 듣는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태어난 생명의 기운을 목소리로만 느끼며 귀국날짜를 손꼽아 기다린다. 첫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알 것이다. 그 더딤의 시간이 얼마나 뭉클한지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정서를 쉽게 찾을 수 없다. 영상통화로 신생아의 탄생과 울음소리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TV,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 때문이다. 백 년 전, 당시의 사람들에게 미디어란 전보나 편지였다. 지금은 어떤가? 걸어 다니는 사람 자체가 훌륭한 미디어가 되었다. 그가 가진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는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조잘거린다는' 뜻의 트위터는 한국에서도 선거의 향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스마트폰의 열풍이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미디어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100여 년 전, 수동 전화기의 모체가 나왔을 때 사회에 미쳤던 변화보다 더 강력하고 예측할 수 없는 현상들이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미디어, 이 도깨비 같은 매체를 통해 사람들은 감정을 공유하고 문제를 푼다. 동시대의 미디어가 갖는 의미와 역할에 대해 궁금하지 않는가? 사실 주머니 안의 휴대전화가 무슨 대단한 판도라의 상자라도 되겠는가. 일상을 세밀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냥 조그만 금속 하나를 들고 있는 것과 같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기 전, 그것이 어떤 파문을 몰고 올지 몰랐듯이 말이다. 서울시립미술관과 바로 길 건너 경희궁 분관은 미디어 작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번쩍거리는 디스플레이 화면과 끝없이 주절거리는 음향시설로 대리석 미술관 건물이 들썩인다.

이번 전시의 컨셉을 '신뢰'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그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미디어라는 매체일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미디어는 신뢰 즉, 증거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교통사고가 나도 일단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찍기 바쁘다. 공증, 계약, 개인 간의 사적 사랑의 맹세까지도 영상으로 남기는 모습을 보며 이번 전시가 왜 신뢰라는 단어를 꼽았는지 알 수 있다. 반대로 미디어를 통해 잘못된 정보나 허위가 유포되어 우리가 믿는 진실이 얼마나 쉽게 신뢰성을 잃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진실이란 두 가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을 작가들은 전시작품을 통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3층 어두운 공간에 마련된 실타굽타의 '노래하는 구름'은 내 발길을 계속 머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구름처럼 조합되어 끝없이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는 마이크 군집은 우리의 모습과 닿아있다. 블로그와 트위터 각종 미디어를 통해 목소리를 낸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검증할 방법도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뜬구름처럼 허공에 떠 있는 마이크를 보며 나는 묘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주위를 빙그레 계속 맴돌며 세계 각국의 노래와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쏟아내는 언어를 알 수는 없다. 안다 해도 모두가 목소리를 동시적으로 쏟아내니 이해하기 난감하다. 이것은 우리 사회와 닿아있다. 너무 많은 말과 주장들. 트위터의 타임라인에 오르는 주절거림들을 눈여겨보기 힘들어진 지 오래다.

경희궁 분관으로 넘어가 점찍어 놓은 작가의 작품을 찾았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작품이다. 이번 칸에서 이창동 감독의 '시'를 제치고 황금종려상을 차지한 '엉클 분미'를 만든 태국의 영화감독이다. 여러 영상물이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처음 관객을 맞는 위치의 작품은 꼭 보기를 권한다. 어디론가 달려가는 청년들을 물 흐르듯 유연한 동선으로 영상에 담아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관계로 산책하듯, 휴식을 취하듯 또 다녀올 생각이다. 산책할 때 길의 지명과 지형을 외울 필요는 없다. 머리를 맑게 하고 기분을 좋게 하려고 가는 것이 산책이다. 이 전시는 그런 산책 같은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다. 미디어시티서울(http://www.mediacityseoul.org/2010/) 관람은 무료이며, 전시는 11월 17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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