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극복을 기원하는 '한양도성 잇기순성'

시민기자 이선미

발행일 2020.10.14. 13:56

수정일 2020.10.14. 16:54

조회 1,355

제8회 한양도성문화제가 지난 10월 9일과 10일 양일간 열렸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올해는 온라인과 비대면 프로그램이 많았다. 필자는 이 가운데 9일 열린 ‘코로나19 극복 기원 잇기순성’이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한양도성문화제 누리집: http://www.hanyangdoseong.com/index.php 을 통해 참여를 신청한 시민들이 한양도성을 백악, 낙산, 목멱, 인왕 등 네 구간으로 나눠 각 구간마다 열 명씩 순성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제8회 한양도성문화제 '잇기 순성' 안내 포스터

제8회 한양도성문화제 '잇기 순성' 안내 포스터 ©한양도성문화제

필자는 집에서 가까운 '낙산 구간'을 신청했다.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이 구간은 서울의 내사산 중 가장 낮은 해발 124m 낙산을 통과해 그야말로 산책하듯이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이 낙산구간은 잇기 순성 프로그램 중 두번 째 타임으로 순성을 시작하는 구간이었다.

발열 체크 등을 마친 낙산 구간 참여자들이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발열 체크 등을 마친 낙산 구간 참여자들이 출발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선미

지난 9일 아침, 구름 좋은 가을 날 혜화문으로 향했다. 한양도성 가운데 수난을 겪지 않은 곳이 드물지만 혜화문은 더욱 힘든 고초를 겪은 곳이다. 위치까지 옮겨져 원래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도 쉽지 않다.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시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잇기순성의 첫 구간인 백악에서 내려오는 시민들을 기다렸다. 파란 하늘 아래 시민들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혜화문 계단을 내려섰다.

잇기순성의 첫 출발지 백악구간 참여자들이 혜화문으로 내려오고 있다.

잇기순성의 첫 출발지 백악구간 참여자들이 혜화문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선미

이제 낙산 구간 참여자들이 순성을 이을 차례다. 도성길라잡이의 안내로 혜화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길을 건너 낙산으로 올랐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길 건너 혜화문을 바라보았다.

혜화문 아래 도로에 안내표지가 새로 설치되었다

혜화문 아래 도로에 안내표지가 새로 설치되었다. ©이선미

낙산으로 올라가며 바라본 혜화문

낙산으로 올라가며 바라본 혜화문 ©이선미

낙산 구간 성곽 너머에는 백동수도원이 있었다. 혜화동의 옛 이름이 백동이었다. 1909년 가톨릭교회 독일 베네딕토회에서 파견된 수도자들이 이곳에 백동수도원을 세웠다. 그들은 베네딕토수도회의 '기도하고 읽고 일하라(Ora, Lege et Labora)'는 가르침대로 포도농사를 짓고, 조선 청년들에게 목공과 철공 등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가톨릭대학교를 둘러싼 성벽을 바라보며 백동수도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톨릭대학교를 둘러싼 성벽을 바라보며 백동수도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선미

1927년 수도원이 함경도 덕원으로 옮겨가자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이 땅을 매입해 수도원 본관에는 가톨릭대학이 들어서고, 철공소는 지금의 혜화유치원이 되었다. 목공소가 있던 곳은 혜화동성당이 세워졌는데, 명동과 약현(중림동) 성당에 이어 서울에서 세 번째 세워진 본당이었다. 옛 이야기들을 들으며 걷다 보니 과거 속으로 잠시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낙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참여자들이 기념촬영을 하였다.

낙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참여자들과 순성 기념촬영에 임했다. ©이선미

한양도성은 태조 이성계가 1396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축조를 시작했다. 이후 태종과 세종, 숙종 연간에도 유지보수가 되어 그 흔적이 서로 다른 모습의 성석에 남아 있다. 성벽의 돌에서는 공사를 맡은 고을과 담당자의 이름 등을 새겨놓은 각자성석도 찾아볼 수도 있다.

얼핏 보아도 성석들의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얼핏 보아도 성석들의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선미

축성을 담당한 고을과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넣은 각자성석들이 있다.

축성을 담당한 고을과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넣은 각자성석들이 있다. ©이선미

성곽 아래로 자리 잡은 장수마을을 내려다보며 걷다가 암문을 통해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저 멀리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은 지세가 약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썼다고 한다.

낙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성곽과 북한산, 저 멀리 성북동도 보인다.

낙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성곽과 북한산, 저 멀리 성북동도 보인다. ©이선미

먼저 동대문 옆에 가산을 쌓고, 나머지 대문과 달리 이름에 한 글자를 더해 동대문은 ‘흥인지문’으로 불렸다. 그리고 반원형 성벽을 한 겹 더 쌓아 옹성을 구축했다. 이런 상황을 알게된 일제는 동대문 옆 가산을 쓸어버리고 그 자리에 동대문운동장을 만들었다. 다행히 이간수문은 거의 원형 그대로 발굴이 되어 옛 자취를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목멱산에서 흘러온 물길이 이 문을 통해 흘러 도성 밖에서 청계천과 합류했다.

이화마을을 지나자 흥인지문의 옹성이 한눈에 펼쳐진다.

이화마을을 지나자 흥인지문의 옹성이 한눈에 펼쳐진다. ©이선미

2007년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된 후 조성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지나 광희문으로 향했다.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가까이 있어 수구문(水口門)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장례행렬이 도성 밖으로 나가던 문이라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리던 남소문이었다. 광희문에서 출발한 '목멱구간'을 걷는 시민들은 남산 구간을 걸어 숭례문에 도착한 뒤 인왕구간을 걸을 시민들에게 바톤터치를 했다. 한양도성 18.625km에 달하는 구간은 이렇듯 시민들의 발걸음으로 이어지고, 연결됐다.

옛 동대문운동장에 세워진 DDP를 돌아가면 광희문에 닿는다.

옛 동대문운동장에 세워진 DDP를 돌아가면 광희문에 닿는다. ©이선미

조선시대에 수도 한양을 상징하는 세 가지 요소는 궁궐, 도성, 종묘였다. 그 가운데 한양도성은 놀이의 장소이기도 했다. 특히 봄과 여름에 즐기던 순성이 있었다. 한양의 주요 사적을 정리한 ‘한경지략’에서 유본예는 순성에 대해 “봄과 여름에 한양 사람들이 짝을 지어 성곽 둘레를 한 바퀴 돌면서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고 했다. 순성은 바라는 것을 마음에 담고 걷는 일이다.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으며 과거시험을 앞둔 유생들이나 장사가 잘 되기를 바라던 운종가 상인들 등이 소망을 가지고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나중에 오늘을 기억하며 그때는 힘들었지…라고 추억할 날이 꼭 오기를 바랍니다'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오늘을 기억하며 그때는 힘들었지…라고 추억할 날이 꼭 오기를 바랍니다'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이선미

올해 한양도성문화제는 코로나19 극복을 기원하며 진행됐다. 시민들은 코로나19 극복을 희망하며 소망을 품고 순성길을 이어서 걸었다. 많은 시민들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져 하루빨리 코로나19 상황이 종료되고 다시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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