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절한 사연 품은 '광희문과 아리랑고개'를 가다

시민기자 염승화

발행일 2020.10.12. 13:02

수정일 2020.10.12. 16:59

조회 2,208

숭례문을 비롯한 서울한양도성의 이른바 8개문인 사대문과 사소문의 이름은 1396년(조선 태조 5) 9월 24일에 지어졌다. 도성을 다 쌓은 직후다. 이중 창의문, 서소문, 혜화문과 함께 사소문에 속하는 ‘광희문(光熙門)’을 지난주에 찾았다.

성문 안에서 바라본 광희문 전경. 문루로 오르내리는 돌계단이 눈길을 끈다

성문 안에서 바라본 광희문 전경. 문루로 오르내리는 돌계단이 눈길을 끈다. ©염승화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광희문은 ‘동남은 광희문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는 기록으로 나타난다. 흥인지문과 숭례문 사이에 놓인 문으로 청계천을 통해 도성 안의 빗물과 하수가 이 부근으로 빠지기에 수구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도성 안의 시신을 내보내던 문이라 ‘시구문(屍軀門)’으로도 불린다.

성벽이 단절된 광희문 옆 도로 바닥 위에 성벽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성벽이 단절된 광희문 옆 도로 바닥 위에 성벽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염승화

도성이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축대가 대로 맞은편 길가 건물 사이에 있다.

도성이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축대가 대로 맞은편 길가 건물 사이에 있다. ©염승화

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내렸다. 3번 출구로 나오니 길 건너편으로 늠름한 광희문이 보인다. 길가에서 도로로 끊어진 성벽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길 바닥에 성벽이 있었던 곳임을 나타내는 ‘서울한양도성’ 문구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허투루 지나면 성벽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작은 축대도 허름한 건물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 표면에 ‘퇴계로 347-1’라고 쓰인 번지 안내판까지 붙어있으므로 얼핏 평범한 돌담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나 옛 성벽이라고 생각되니 공연히 감개무량해졌다.

천주교 순교성지인 천주교순교자헌양관과 아리랑고개로 이어지는 길목이 보이는 풍경.

천주교 순교성지인 천주교순교자헌양관과 아리랑고개로 이어지는 길목이 보이는 풍경. ©염승화

광희문을 안팎으로 꼼꼼히 살펴보기 전에 주변을 먼저 둘러보았다. 광희문 앞은 그러니까 성문 밖은 예로부터 사연이 많은 장소다. 평소에는 장례행렬이 지나며 초제를 지냈고, 조선 말기에는 서소문 앞과 마찬가지로 적잖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당한 가슴 아픈 곳이었다. 천주교 순교자헌양관이 광희문과 마주보듯이 설립되어 있는 까닭이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몽진에 나선 인조 임금이 조선 왕으로는 처음으로 이 문을 빠져나갔다는 일화도 있다.

광희문 앞에는 신당동이나 왕십리 방면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이 있다.

광희문 앞에는 신당동이나 왕십리 방면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이 있다. ©염승화

곧 헌양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고갯길로 올랐다. 바로 ‘아리랑고개’다. ‘성문을 나온 운구가 이 일대 꼬불꼬불 언덕을 넘어 신당동 화장터나 왕십리, 금호동 공동묘지로 갔다’라는 내용의 안내 문구가 언덕 마루 한 편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다. 눈앞으로 꽃상여가 지나는 장면을 떠올려보며 다시 광희문으로 향했다.

광희문 정면을 아리랑고개를 내려온 뒤 헌양관 앞에서 바라본 모습

광희문 정면을 아리랑고개를 내려온 뒤 헌양관 앞에서 바라본 모습 ©염승화

무지개처럼 둥글게 홍예로 이루어진 성문에 바투 선 채로 잠시 문루 가운데에 광희문 세 글자가 선명히 박힌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다락집을 처음 올린 18세기 초 숙종 임금 때 비로소 달아 놓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도로 건설 등으로 헐렸던 성문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지닌 것은 1975년 도성복원공사를 통해서다. 원래 위치보다 남쪽으로 15m쯤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

커다란 철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홍예문 안팎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점이 매력이다.

커다란 철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홍예문 안팎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점이 매력이다. ©염승화

곧 좌우로 커다란 철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여느 문과 달리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도록 늘 열려 있다. 성문을 둘러 울타리가 쳐지고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2014년부터의 일이라고 한다. 돌문과 돌문 사이 통로 벽면을 지탱하고 있는 육중한 성돌들과 천정에 그려져 있는 무늬 선명한 용 그림에 번갈아가며 눈길이 꽂혔다.

성문 안 성벽을 따라 나 있는 길 연변으로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성문 안 성벽을 따라 나 있는 길 연변으로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염승화

내친김에 성문 안 쪽 성벽을 따라 나 있는 길로 접어들었다. 성 안팎을 한 바퀴 돌아볼 요량이다. 푸른 잔디 위로 이어지는 성벽 건너편에는 주택들이 옹기종기 늘어서 있었다. 성벽은 100여m쯤 이어지다가 이내 끊어지고 말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광희문 앞 아리랑고개에서는 19세기 말 미 선교사가 설립한 유래 깊은 교회도 만난다.

광희문 앞 아리랑고개에서는 19세기 말 미 선교사가 설립한 유서 깊은 교회도 만난다. ©염승화

단절된 성벽을 돌아 성 밖 광희문으로 되돌아오는 내리막길에서는 예스러운 풍치가 돋보이는 붉은색 교회 건물을 먼발치에서 마주하였다. 평범치 않은 품새가 느껴지는 건물이다. 자료를 검색해 보니 120년이 넘는 연륜을 자랑하는 광희문교회다. 조선에 온 미국 남 감리교회 선교사 리드(Reid, C.F.)가 1897년에 세웠다고 한다.

광희문은 서울한양도성의 ‘흥인지문 구간’에 포함되는 작은 성문으로 서울 도심 퇴계로 끄트머리쯤에서 만난다. 풍치가 좋고 성문이 24시간 오픈되어 각광을 받는다. 스토리가 풍부한 광희문과 그 일원으로의 역사 문화 여행을 권하고 싶다.

서울한양도성 광희문 
○ 주소 : 서울시 중구 광희동2가 105
○ 교통 : 지하철 2, 4,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 > 도보3분 > 광희문 앞
○ 운영 : 연중무휴 / 상시 개방
○ 입장료 : 무료

○ 문의 : 02-3396-5882 (중구청 공원녹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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