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빛에 반하고, 무계원에 반했다

시민기자 이선미

발행일 2020.07.24. 14:02

수정일 2020.07.27. 09:04

조회 1,677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꿈에 무릉도원을 보았다. 그는 화가 안견에게 꿈을 자세히 전해 3일 만에 ‘몽유도원도’가 세상에 태어났다. 대군은 꿈속에서 본 것과 흡사한 곳에 정자를 짓고 시대를 풍미했으니 무계정사였다. 당시 1만 권이 넘는 장서가 있었다는 무계정사에는 내로라하는 이들이 출입하며 교류했다. 하지만 안평대군은 1453년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았다. 단종이 즉위하고 1년 후에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이 정적들을 제거하며 안평대군 역시 반역죄로 본 것이다. 이후 무계정사는 폐허가 되었다.

안평대군의 무계정사는 없지만 무계원이 옛 역사를 잠시 떠올리게 한다

안평대군의 무계정사는 없지만 무계원이 옛 역사를 잠시 떠올리게 한다 ⓒ이선미

2014년 종로구 부암동에 무계정사를 기억하는 건물이 들어섰다. 익선동의 오진암 건물을 그대로 옮겨온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이다. 오진암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내관으로 서화가이기도 했던 이병직의 집이었는데, 지금은 길상사로 거듭난 대원각과 전통문화공연장이 된 삼청각과 더불어 1970년-1980년대 요정 정치의 근거지였다. 실제로 이곳에서 7.4남북공동성명이 논의되기도 했다고 한다.

무계원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옥공예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손세정제가 비치된 입구에서 열 체크를 하고 방문자 명단을 쓴 후 마당으로 올라갔다. 종로구 청진동에서 조선시대 시전행랑 등을 발굴할 때 지하 4미터 정도에서 나온 돌로 쌓아올린 석축이 인상적이었다.

조선시대 시전행랑 발굴에서 나온 돌로 쌓아올린 석축이 인상적인 무계원

조선시대 시전행랑 발굴에서 나온 돌로 쌓아올린 석축이 인상적인 무계원 ⓒ이선미

‘옥, 빛에 반하다’ 전시가 열리는 안채에 들어섰다. 무계원은 지난 6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7호인 엄익평 옥장의 특강과 시연을 준비했다가 코로나19 감염 확산이 심각해지면서 전면 취소해야 했다. 모든 보석 공예가 그렇지만 돌덩이인 옥이 그토록 섬세하게 다듬어져 정교한 문양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고 싶었는데 무척이나 서운했다. 안채의 한 방에 장인의 시연을 위해 준비했던 도구와 원석들이 그대로 있었다. 여러 종류의 옥과 공작석, 산호, 호박, 비취에 라피스라줄리까지 무척이나 귀한 돌들이었다.

시연을 위해 준비한 옥공예 도구들과 원석들

시연을 위해 준비한 옥공예 도구들과 원석들 ⓒ이선미

요즘은 옥으로 장신구를 하는 경우가 그다지 없지만 예로부터 동양 문화에서는 으뜸가는 보석으로 귀히 여겼다. 더욱이 몸에 지니면 사악한 힘을 물리친다고 해서 십장생, 당초문 등을 새겨 행운을 기원하기도 했다.

무계원은 익선동에 있던 오진암 건물을 옮겨와 문을 열었다

무계원은 익선동에 있던 오진암 건물을 옮겨와 문을 열었다 ⓒ이선미

여인들의 가슴을 콩닥거리게 했을 화려한 장신구만이 아니라 남성들이 쓰던 물건들도 보였다. 상투가 풀어지지 않게 고정시키던 동곳과 갓 위에 달던 옥로, 망건 중앙에 꾸미던 풍잠 등 남성들의 장신구들도 멋스러웠다.

갓 위에 달던 옥로 상투가 틀어지지 않게 고정하던 동곳

갓 위에 달던 옥로(좌) 상투가 틀어지지 않게 고정하던 동곳(우) ⓒ이선미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노리개 장식도 눈길을 끌었다. 대삼작 노리개에는 보석들 틈에 물총새 깃털을 오려 붙여 한결 멋을 내기도 했다. 파란 깃털이 라피스라줄리처럼 오묘한 느낌을 주었다. 투각이 많이 들어간 향갑노리개 역시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향갑에는 향만이 아니라 비상약도 넣어 다녔다고 한다.

물총새 깃털을 오려 넣어 더 화려한 대삼작 노리개

물총새 깃털을 오려 넣어 더 화려한 대삼작 노리개 ⓒ이선미

향갑노리개의 향갑에는 향을 넣거나 비상약을 넣기도 했다

향갑노리개의 향갑에는 향을 넣거나 비상약을 넣기도 했다 ⓒ이선미

옥은 장신구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권위와 신분의 척도가 되기도 했다. 임금의 인장을 옥새라고 하고, 임금의 자리를 옥좌라고 부르는 데서도 그 영예로운 자취를 볼 수 있다. 전시에는 실제 옥새를 모티프로 한 백옥 옥새들과 영조임금의 옥 각대 등도 재현되어 있다.

실제 옥새를 모티프로 재현한 백옥 옥새

실제 옥새를 모티프로 재현한 백옥 옥새 ⓒ이선미

전시를 보면서 새삼 우리 조상들의 미적 감각과 향유하던 문화 수준에 감탄했다. 특히 무척이나 단아한 벼루병풍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글을 쓰던 선비들이 벼루병풍을 세워놓는 것은 ‘방해하지 마시오’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고 한다. 요즘으로 하면 도서관 칸막이 같은 역할이었다고 할까?

선비들이 글을 쓸 때 칸막이 역할을 한 벼루병풍

선비들이 글을 쓸 때 칸막이 역할을 한 벼루병풍 ⓒ이선미

무계원 뒷마당으로 돌아가 보았다. 북한산 보현봉과 암수 사자봉이 환히 바라보였다. 무계정사는 자취도 없지만 ‘청계동천’이 시작되는 이 마을이 무릉도원 못지않게 아름다웠으리라는 상상은 할 수 있었다.

무계원 뒷마당에서는 북한산 보현봉과 암수 사자봉이 환히 보인다

무계원 뒷마당에서는 북한산 보현봉과 암수 사자봉이 환히 보인다 ⓒ이선미

그 옛날 안평대군이 ‘무계동’을 새겨놓았다는 바위는 사유지가 되어 들어가 볼 수 없다. 바로 근처에 현진건이 살던 집도 있었는데, 능소화 흐드러지는 대문 앞에 그의 집터였다는 표지석이 있었다.

무계원 바로 위쪽으로 현진건 집터가 있다

무계원 바로 위쪽으로 현진건 집터가 있다 ⓒ이선미

전통문화 공간으로 문을 연 무계원은 인문학 특강과 효교육, 콘서트와 다도교실 등을 진행한다. 기획전시 ‘옥, 빛에 반하다’는 7월 26일까지 진행되며, 종로문화재단 블로그, 밴드, 페이스북,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에서도 만날 수 있다.

■ 무계원
○ 위치 :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2
○ 운영시간 : 10:00 ~ 17:00
○ 휴무일 : 월요일
○ 종로문화재단 유튜브 채널 : https://www.youtube.com/watch?v=AS9BwMLSsmA&list=PL0EKu2bEifsUy67YXHE7AI58LBXzyjJF4
○ 홈페이지 : https://www.jfac.or.kr/site/main/home
○ 문의 : 02-379-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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