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어린이날은 어떻게 생겼어요?
발행일 2020.05.04. 12:26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 주십시오. 어린이를 항상 칭찬해 가며 기르십시오. 어린이에게 늘 책을 읽히십시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 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 이는 아동문학가이자 문화운동가 소파 방정환 선생이 영면해 있는 망우리 묘역 앞 어록비에 새겨진 글이다. 구절 하나하나에 어린 생명을 존중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스며있다.
망우리 묘역 중턱에 있는 방정환의 어록비. 문구 하나하나에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스며있다 ⓒ조시승
2020년 5월 5일은 98번째 맞는 어린이날이다. 1922년 5월 당시 24세 청년 방정환이 어린이날을 선포할 당시 상황은 3.1운동 이후 삼엄한 일제강점기였다. 더구나 유교적 가부장제가 자리 잡은 조선시대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로 인해 어린이들이 마치 어른들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그는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장차 나라를 짊어질 어린이들을 바로 일으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한 사람의 인격으로 키워나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1923년 5월 1일 그는 ‘천도교소년회’등 서울 시내 40여 개 소년단체로 구성된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서울 종로구 천도교 교당(수운회관)에서 첫‘어린이날 선언문 행사’를 치렀다. 이날 세계 최초의 어린이 인권선언으로 평가받는 ‘어린이날 선언문’이 발표된 것이다.
종로구 천도교당 입구에 있는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비 ⓒ조시승
당시 조선은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서 자주권을 상실한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에 방정환은 힘이 없어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젊은이나 늙은이에게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고, 오직 뒤를 이어나가는 새로운 세대만이 미래를 밝혀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희망은 바로 조국의 부흥과 광복. 낡은 세대들이 새사람이 될 어린이를 정성껏 보살피고 소중히 키우면 후에 그들이 반드시 조국의 독립을 이끌어 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것이라 믿었다.
수운회관에 전시되어 있는 천도교 청년회 창립과 신문화운동 전시물
그가 조국 독립의 염원을 담아 어린이 문화운동에 헌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오직 온 힘을 다하여 가련한 우리 후손인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어린이날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 어린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어린이들을 굴욕적인 복종에 길들여지지 않는 진취적인 민족의 동량으로 키워 내고자 하는 염원이 모아져 탄생된 것이다.
어린이날 행사는 좀 더 많은 사람과 어린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1927년부터 5월 첫째 일요일에 열었다. 이때 동화와 동요 대회, 미술 전람회 등 어린이들이 직접 참가하거나 관람할 수 있는 행사들이 많이 열렸다. 그러나 이런 어린이날 운동이나 행사가 민족의식을 높일 것을 염려한 일제는 1934년 행사에 어린이 참여를 폐지시켰다. 1937년부터 어린이날 행사조차 금지시켰다. 그러다 8·15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어린이날이 5월 5일로 바뀌어 시행되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계 어린이 운동 발상지에 있는 방정환어록 ⓒ조시승
어린이날을 만들고, 어린이라는 말을 널리 퍼뜨리고, 평생을 어린이의 친구로 살다 간 소파의 일생은 파란만장했다. 1899년 11월 9일, 서울 종로구 야주동(당주동)에서 태어난 소파는 계모 밑에서 자랐다. 1909년 매동 보통학교(매동초등)에 입학해 이듬해 미동 보통학교로 전학했지만 넉넉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졸업을 못했다. 그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최남선이 발간하던 서적인 소년·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등을 탐독했다.
방정환이 아동문학에 관심 갖게 된 것은 10살이 되던 1908년 어느 미술가가 그에게 선물한 환등기 때문이었다. 방정환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환등기를 영사하면서 상상의 세계를 영상으로 연출하는 것과 변사 흉내를 내면서 연기를 하는 데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 이내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후에 청춘의 현상작문에도 당선되면서, 아동문학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 1916년 생계를 돕기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기 업무를 담당했으나 1917년 4월 천도교(天道敎) 3세 교주요, 3·1운동 33인의 대표인 손병희(孫秉熙)의 셋째딸 손용화(孫溶嬅)와 결혼했고 이후 천도교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이 어린이대공원 야외공연장 동상 옆에 있다 ⓒ조시승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이후 10년간 그는 이 나라 어린이 운동의 산 역사였다. 앞서 1920년 천도교에서 펴내는 월간지 ‘개벽’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 불 켜는 이’를 발표했고 이때 ‘어린이’라는 말이 처음 쓰였다. ‘어린이’라는 말도 ‘늙은이’, ‘젊은이’라는 말과 대등한 의미로 쓴 것인데 어린이를 비하하거나 낮추어 부르지 말고 존중하여 부르자는 뜻이 담겨 있다. 안데르센동화 · 그림동화 · 아라비안나이트 등을 초역한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편집, 1922년 6월 개벽사에서 발행한 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선언문’ 행사를 한 이듬해 어린이 문학 단체 ‘색동회’를 만들어 어린이 문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어린 동무들에게 드리는 글. 방정환 동상 옆에 새겨져 있다 ⓒ조시승
여름방학에는 전국을 순회강연하면서 어린이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번역집 ‘사랑의 선물’ 머리글을 이렇게 썼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혼들을 위하여, 그윽이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읽을거리에 굶주리던 어린이들에게, ‘사랑의 선물’로 펴낸 이 책은 마침내 조선에서 제일 잘 팔리는 책이 되어 어린이가 폐간될 때까지 10여 년 동안에 20여 판이 나갔다. 또 그가 펴낸 월간 '어린이'는 10만 부 발행부수를 자랑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32만 명인데 10만 부는 놀라운 출판물이었다.
어린이의 영원한 벗 소파 방정환 선생의 약력 ⓒ조시승
이외 그는 동화구연대회와 연극 공연 등 다양한 어린이 문화운동을 펼쳤다. 색동이라는 이름은 어린이들이 색동저고리처럼 밝게 자라라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익힌 이야기 솜씨로 어린이뿐 아니라 죄수들에게까지 동화구연을 했는데, 듣는 사람은 모두 감정이 고조되어 눈물을 흘릴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보였다.
소파 방정환의 묘소가 잘 조성되어 있고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조시승
매년 70회가 넘는 동화 구연과 강연 때문에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는데, 이로 인해서 건강에 문제가 발생했다. 원래 비만인 데다가 고혈압이 있었는데, 1928년 세계 20개국의 어린이들이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한 뒤부터 과로와 스트레스로 건강이 나빠져 한동안 입원했다. 1931년부터 과로가 겹치고 줄담배의 영향으로 지병인 고혈압이 악화되어 1931년 7월 23일 방정환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재 서울대병원)에서 서른둘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어린이’란 말을 널리 전하고, ‘어린이날’을 만들고, 1923년 첫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어린이 문화의 산증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동심여선' 어린이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는 의미이다 ⓒ조시승
‘동심여선(童心如仙)’. 서울 망우리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동심여선’은 ‘어린이의 마음은 신선(천사)과 같다’는 뜻. 묘역 입구의 어록비에는 ‘어린이날의 약속’ 중 일부가 새겨져 있다. 어린이를 어른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이라 여겨야 한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이를 ‘올려다 본’ 진정한 어린이 운동가 방정환.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라는 그의 마지막 유언에서도 그가 얼마나 어린이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호 小派 즉 작은 물결의 뜻과 정신은 이제 큰 물결로 여울지며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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