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묘역길에서 만난 830년 애국나무

시민기자 최용수

발행일 2020.04.24. 09:36

수정일 2020.04.24. 14:56

조회 1,150

개나리, 진달래, 벚꽃을 따라 날아든 봄은 어느새 연녹색 나뭇가지 위로 옮겨와 있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은 잠시 멈췄지만 계절의 순환은 막을 수 없다. 

서울둘레길 왕실묘역길 구간에 핀 진달래꽃

서울둘레길 왕실묘역길 구간에 핀 진달래꽃 ⓒ최용수

코로나19 때문에 먼 곳에 두고 보았던 봄, 모처럼 봄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 보았다. 번잡한 도심공원보다는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은 서울둘레길의 ‘왕실묘역길’을 걸었다. 총 연장 157km의 서울 둘레길은 8개 소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역사와 문화, 자연 생태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구간을 선택했다. 연산군의 묘와 세종대왕의 둘째 딸 정의공주의 묘가 있어 왕실묘역길이라는 이름을 얻은 곳이다.

왕실묘역길 구간의 서울둘레길 인증 스탬프 시설

왕실묘역길 구간의 서울둘레길 인증 스탬프 시설 ⓒ최용수

지하철 쌍문역에서 버스 130번을 타고 연산군·정의공주묘 앞 정류소에서 하차해, 도보 3분이면 도착한다. 우선 원당샘공원으로 향했다. 원당샘은 600여 년 전 파평윤씨 일가가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이용한 샘이라 한다. 수량이 풍부해 극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혹한에도 얼어붙은 일이 없는 우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원당샘공원 인근에는 문학이 함께 하는 문학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원당샘공원 인근에는 문학이 함께 하는 문학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최용수

그런데 2009년부터 원당샘은 물이 말라 흐르지 않게 되었다. 이에 2011년에는 지하수를 연결하여 수량이 넉넉하던 과거의 원당샘으로 복원했다. 매일 아침이면 인근 주민들의 물통이 긴 줄을 만든다. 서울둘레길·북한산둘레길과 인접하여 시민들의 왕래가 빈번하자 도봉구에서 원당샘공원을 조성했다.

600년 전 파평윤씨 마을에서 사용하던 원당샘 모습

600년 전 파평윤씨 마을에서 사용하던 원당샘 모습 ⓒ최용수

원당샘공원 입구에는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수령 830여 년이 넘은 ‘방학동 은행나무’로 불리는 나무이다. 수고 25m, 지상 1.5m에서 4개의 큰 가지로 갈라지며 다시 중·상층부에서 여러 개의 가지로 뻗어나 웅대한 수형을 이루고 있다. 서울의 은행나무 중 나이가 많은 순을 따지면 방학동 은행나무가 으뜸이라 한다.

서울시 첫 번째 지정 보호수 방학동 은행나무

서울시 첫 번째 지정 보호수 방학동 은행나무 ⓒ최용수

방학동 은행나무에는 1.2m 크기의 혹처럼 생긴 유주(乳柱)가 매달려 있어, 예로부터 신령수(神靈樹)로 사랑받았다. 유주란 ‘젖기둥’이라는 뜻으로 그 모양이 마치 여인의 젖가슴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흙 속에 묻힌 뿌리의 호흡만으로는 모자라는 숨을 보충하기 위해 나뭇가지에 돋아난 일종의 뿌리이다. 아주 오래된 나무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것으로 유주가 생기는 대표적인 나무가 은행나무이다.

830여 년의 유주가 달린 신령수 방학동은행나무

830여 년의 유주가 달린 신령수 방학동 은행나무 ⓒ최용수

방학동 은행나무는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마다 나무에 불이 나 위태로움을 미리 알려주어 일명 ‘애국 나무’로 불리어 왔다. 지금도 주민들은 정월대보름에 은행나무 밑에서 국가와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이날에도 소원을 이루려는 아낙들이 은행나무 주위를 돌고 또 돈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역사적 존재감을 인정받아 1968년 2월 26일, 서울의 첫 번째 보호수(지정번호 보호수10-1)로 지정되었다. 

왕실묘역길의 연산군 묘역

왕실묘역길의 연산군 묘역 ⓒ최용수

은행나무 맞은편 언덕에는 조선의 제10대 왕이었던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묘가 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된 후 강화도로 추방된 연산군은 숨을 거둔 후 그곳에서 장례를 지냈는데 부인 신씨의 간절한 요청으로 중종(中宗)이 은행나무가 있는 방학동 언덕으로 이장을 시켜주었다. ‘폭군’으로 역사에 남은 연산군은 대군의 예우에 준하여 묘(墓)로 조성되어 초라한 모습이다. 묘역 아래에는 재실(齋室)이 있다. 재실은 묘를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는 곳이다. 연산군 제향은 매년 4월 2일 청명제(청명날 올리는 제)로 실시된다.

연산군묘 재실 모습

연산군묘 재실 모습 ⓒ최용수

지금도 방학동에는 은행나무와 연산군묘에 관련된 전설이 전해온다. 어스름한 새벽 한 여인이 방학동 은행나무 아래에서 아들을 낳게 해 달라며 절박한 마음으로 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 곤룡포를 입은 임금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후 여인은 소원대로 귀한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비록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이지만 한때 나라를 다스리던 임금이었기에 백성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싶다.

세종의 둘째 딸, 한글창제 참여한 정의공주 부부 묘역

세종의 둘째 딸, 한글창제 참여한 정의공주 부부 묘역 ⓒ최용수

연산군묘에서 조금 나오면 정의공주와 양효공 안맹담의 묘역이 있다. 정의공주는 세종과 소헌 왕후 심씨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총명하고 민첩하여 세종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한글창제에도 기여했다. 1477년(성종 8) 별세하여 남편 안맹담 옆에 안장되었다. 

총 1.6km에 달하는 왕실묘역길은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끼면서 바쁜 일상에서 쉼표를 찍을 수 있는 길이다. 5월 황금연휴에 방문해 걸어보면 어떨까. 

원당샘공원에는 김병로, 김수영 등 도봉 현대사를 빛낸 인물을 새긴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원당샘공원에는 김병로, 김수영 등 도봉 현대사를 빛낸 인물을 새긴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최용수

■ 원당샘공원 찾아가는길
○ 위치 : 도봉구 방학동 547번지 일대
○ 교통편 : 버스 130번, 1144번, 1161번 '연산군정의공주묘' 앞 하차 (도보 6분 거리)
○ 문의 : 도봉구 공원녹지과 02-2091-3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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