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 시간

시민기자 박은영

발행일 2020.03.13. 15:40

수정일 2020.09.01. 18:12

조회 1,873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지 열흘째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거나, 재활용을 내다 놓을 때 외에는 가급적 현관 밖을 나가지 않았다. 물론 답답하고 우울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매일 아이들에게 삼시 세끼를 챙겨주느라 고단하기도 하다. 일을 하러 나가거나 사람들을 만날 때는 답답한 마음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자발적 격리의 시기다.

코로나19로 넘치는 뉴스를 보거나 내가 사는 지역의 확진자 수가 늘었다는 긴급 메시지가 울릴 때면,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막연한 불안감이 조금씩 천천히 내 주위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호흡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시기가 내게도 닥치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쇼트트랙 경기를 보고 있으니 엔도르핀이 솟는다

흥미진진한 쇼트트랙 경기를 보고 있으니 엔도르핀이 솟는다 ⓒ박은영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엔도르핀이 솟는 방송을 접했다. 바로 2019년도부터 2020년까지의 쇼트트랙 경기를 방송해 주는 스포츠 채널이다. 매일 오전과 오후,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각종 대회와 월드컵 대회를 재방송했다. 출발에서는 뒤처졌지만,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메달을 따내는 우리 선수들의 모습은 가라앉은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어 줬다.

최민정, 서휘민, 김아랑, 노아름, 김다겸, 박지원 등 쇼트트랙 선수들의 이름도 다 외웠다. 두 번째로 잘못 출발한 선수는 바로 실격되거나 각 경기마다 포인트를 통해 쇼트트랙 선수들의 종합 순위가 결정된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오랜만에 스포츠를 보며 마음이 흥분되는 것을 느끼게 되니 그 기세를 몰아 평소에 생각만 하고 하지 못했던 소확행들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보지 못했던 영화들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보지 못했던 영화들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난 어릴 적부터 영화광이었다. 지금도 늘 보고 싶은 영화를 메모지에 적어 둔다. 하지만 현실은 TV에서 방송될 때가 돼서야 보고는 했다. 특히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나 켄 로치 감독 등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 영화를 즐겨 본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 사회는 아직 많은 변화가 필요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행복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는 반드시 돈을 주고 다운로드해야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네이버의 '시리즈 온'이라는 앱을 설치하거나 각자 사용하는 통신사를 검색해 보면 무료 영화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늘 읽다가 중간에 그만둔 책이 있었고, 영화도 그랬다. 책은 시간을 내서 읽는 것이 아니라 틈틈이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손이 닿는데 두고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책을 읽는 습관은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깊이 있는 시간을 선사했다. 다른 세상을 느끼거나 즐기고 싶다면 그건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최근에는 온라인으로만 장을 봤다. 물건을 받을 때는 '문 앞에 놓고 가 주세요'라며 비대면으로 물건을 받는다. 무료 배송을 받으려면 정해진 금액을 넘어야 해서 일주일 치 장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냉장고에서 상하는 식재료도 있었다. 잠시 멈춤 상태인 요즘은 일명 '냉장고 파먹기'를 하기에 좋은 날들이다.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를 적어두고 하나 둘 선을 그어 가면 요리를 하고 아이들이 맛있게 먹어주기까지 하면 그게 또 작은 행복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자발적 가택구금 중인 분들 모두 하루 종일 뉴스만 보며 우울해하기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소확행을 찾아보자. 보고 싶다고 적어둔 영화가 있거나 읽고 싶었던 작가의 신간이 출간됐다면 지금 이 순간의 자유를 놓치지 말자.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들을 다시 읽으며 소확행을 누리고 있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들을 다시 읽으며 소확행을 누리고 있다 ⓒ박은영

쇼트트랙과 영화, 독서, 냉장고 파먹기를 하고 자리에 앉으면 어느새 무릎에 파고드는 생명체가 있다. 바로 우리 집 반려묘 ’레이‘다. 집사 생활 3년 차에 고양이와 놀아주는 스킬도 조금씩 늘고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시간이 없거나 한가해도 도도한 고양이 레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늘 포근하고 사랑스러운 소확행이다.

영화 '소공녀'에서는 담배 한 개비와 위스키 한 잔으로 소확행을 즐기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준다. 다들 각자의 소확행이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 행복이 차오르는 소소한 일들 말이다. 코로나19가 만든 사회적 거리두기는 집을 단순히 주거공간이 아닌 휴식과 문화, 레저를 즐기는 공간으로 확대했다. 집안에서 다양한 경제활동이 이뤄지는 신조어 홈코노미(Home+Economy)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반려묘와 함께 해요

멈추는 데 일가견이 있는 우리집 반려묘 레이와 함께 '잠시 멈춤' 캠페인에 동참했다 ⓒ박은영

아이들이 게임만 하거나,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고 신경이 곤두설 때도 있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어차피 각자가 행복해야 가족이 행복할 수 있다. '코비드19 서울시 심리지원단(http://covid19seoulmind.org)'을 보면서 아이들이라고 스트레스가 왜 없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잘 지내고 있다면 칭찬해 주라는 심리지원단의 조언이 마음에 들어왔다.

'잠시 멈춤'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간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과 말없이 잡아주는 손의 온기가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를 느끼게 한다. 지금 멈춰있는 시간들은 내가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들을 마음으로 연결하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진짜 중요한 건 환경이 아니라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을 잠시 멈춰야 하는 지금 이 순간은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그게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본인이 가장 행복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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