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터'에서 그들을 기억하다

시민기자 조시승

발행일 2019.12.27. 15:04

수정일 2019.12.27. 15:05

조회 1,778

‘내 나이 12살, 언니와 나물을 뜯는데 차가 오더니 모자 쓴 군인들이 차 타라고 했다. 둘이 끌어안고 버텼더니 나를 발로 차버리고 언니 머리채를 쥐고 차에 태웠다. 내가 울어대니 나까지 주워 올려 한꺼번에 잡혀 갔다. 대만에서 다른 차에 실린 언니와 헤어져 생사도 모른다.’ 
‘도망가다 붙들려 총끝으로 엉덩이를 세대나 얻어맞고 고꾸라졌다. 푹 패인 엉덩이 상처는 곪아서 똑바로 눕지도 못하는데 열은 펄펄났다. 그래도 손님(군인)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망가진 우리몸 꼴을 보고 군인들이 오히려 도망갔다.’

'대지의 눈' 벽면에 새겨진 위안부 증언을 살펴보는 가족관람객

'대지의 눈' 벽면에 새겨진 위안부의 증언을 살펴보는 가족관람객 ⓒ조시승

위안부의 눈을 상징한 조형물 ‘대지의 눈’ 맞은 편에 새겨진 위안부들의 증언 중 일부다. ‘기억의 터’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공간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전세계적 여성 문제로 떠올랐는데도 서울에 그 아픔을 기리는 공간이 없다는 지적에서 추진되었다. 생각하면 국권을 찬탈당한 시발점인 수치스러운 곳에서 그들에게 당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린다는게 부조화의 극치이다. 어쩌면 의표를 찌르는 역발상으로 통감관저와 기억의 터는 대척적 관계로 더욱 통렬히 기억되는 형상물로 연출될 것이다.

국치의 터 통감관저터옆에 거꾸로 세운 비석이 있다.

국치 터, 한국통감관저 터에 거꾸로 세운 비석이 있다 ⓒ조시승

‘기억의 터’는 어떤 장소인가? 대부분 국민들은 조선총독부가 광화문 뒤쪽에 위치했다고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조선총독부가 그곳에 위치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남산에 위치했다가 1926년 경복궁 내 새로 총독부를 짓고 이전한 것이다. 또 남산에는 일제의 통감관저, 일본신사와 일본군 주력부대가 주둔했다. 명동에는 일본인 거주지가 있고, 을지로는 일본인 금융센터였다. 그런즉 남산과 그 일대는 식민지배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기억의 터’는 치욕스러운 역사의 장소를 잊지 않는 장소로 만들고자 이 위치에 만들어졌다. '기억의 터'가 조성된 2016년 8월 29일도 의미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일병합조약을 맺고 한국을 강점했다고 공표한 날이다. '기억의 터'는 서울시에서 제작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모금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뜻에 따라 1만 9,754명의 범국민 모금 운동으로 조성된 공간이다.

명동역 인근의 평화의 소녀상 입체 홍보물

명동역 인근의 평화의 소녀상 입체 홍보물 ⓒ조시승

‘기억의 터’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추모 공간인 ‘대지의 눈’을 보면 낯선 손에 팔목을 붙잡혀 끌려가는 어린 여학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끌려가면서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고(故) 김순덕 위안부 할머니의 그림이다. 당시 17세의 꽃다운 나이다. 작품은 진실을 바라보는 위안부의 눈을 형상화했다. 또 추모 공간에는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과 증언이 새겨져 있다. 검은 눈동자를 깨끗이 닦으면 위안부들의 증언이 비춰진다.

고(故) 김순덕 위안부 할머니의 그림. 추모공간에는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과 증언이 새겨져 있다 ⓒ조시승

 고(故) 김순덕 위안부 할머니의 그림. 추모공간에는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과 증언이 새겨져 있다 ⓒ조시승

‘세상의 배꼽’은 보름달처럼 생긴 검은색 둥근돌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귀가 4개 국어(한글, 일본어, 영어, 중국어)로 새겨져 있다. 작은 나비의 몸짓이 태풍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듯 위안부에 대한 작은 한명의 관심이 세계로 뻗는 형상이다. 나아가 우리의 외침이 그들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도록 두손을 마주한 그림이 돌에 새겨져 있다. '엄마의 마음으로 따뜻하게 손을 맞잡아 준다'는 의미다. 고흥석으로 된 돌 원탁 아래 스프링으로 쇼바장치가 되어있다. 흔들면 흔들리기도 하는 이 돌에 앉아 쉬면서 그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상의 배꼽' 작은 나비의 몸짓이 태풍처럼 큰 반향일기를 바란다.

'세상의 배꼽'. 작은 나비의 몸짓이 태풍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기를 바란다 ⓒ조시승

‘거꾸로 세운 비석’은 치욕의 장소를 잊지말자는 의미로 조선통감관저에 있던 비석을 거꾸로 세워놓았다. 이 비석의 주인공 ‘하야시 곤스케’는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겁박, 병탄의 발판을 닦은 공로로 남작작위를 받았다. 광복70주년을 맞아 흩어진 동상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웠다.

거꾸로 세워진 비석에 부착된 안내판

거꾸로 세워진 비석에 붙은 안내판 ⓒ조시승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상징하는 상징물이다. 1,000번째 수요집회를 맞아 2011년 12월 14일에 공개되었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졌고 시민 모금을 통해 김운성, 김서경 부부 작가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평화의 소녀상은 국내외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소녀였던 시절 고향과 가족을 떠나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지게 되었다. 이곳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성함이 기록되었는데, 실제 피해자들은 더 많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폐가 될까봐 또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까봐 숨어 계셨던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아픔을 안고 고향으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누구도 그분들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 역사의 뒤안에서 나라도, 부모형제도 외면했던 그 통한을 떠올리며 원탁에 새겨진 글이 마음에 오래 여운을 남긴다.

충무로 역사내 위안부 입체홍보포스터가 매립형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다.

충무로 역사 내에 게시된 위안부 입체 홍보 포스터 ⓒ조시승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이 잊어서는 안될 역사인 남산 ‘기억의 터’가 오래 기억되도록 서울시는 색다른 홍보를 선보이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을 '입체홍보 포스터'로 제작해 오가는 사람들 눈길을 끌고 있는 것이다. 지난 12월 11일 바로 ‘기억의 터’로 가는 길 입구인 지하철 4호선 명동역과 충무로역 일대에 등장한 소녀상 입체 포스터는 렌즈에 의해 영상이 서로 다르게 굴절되는 ‘렌티큘라 방식’을 사용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띄운다. 정방향을 보면 정상적으로 보이다가 방향을 달리해 바라보면 다리부분만 나온다. 또 방향을 달리하니 소녀상이 흐릿해진다.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빈 의자가 되고 ‘기억하지 않으면 진실은 사라집니다’라는 문구만 남는다. ‘기억의 터’로 가는 길목 명동역(가로판매대 4개소, 구두수선대 7개소)과 충무로역 (가로판매대 3개소, 구두수선대 4개소) 일대에 부착됐다. 아울러 역사 내 입체 포스터 게시판(명동역사내 2개소, 충무로역사내 4개소)과 승강장 매립형 게시판(충무로역사내 2개소)에서도 홍보판을 볼 수 있다.

명동입구 가로판매대의 위안부 입체 홍보포스터와 '기억의 터' 홍보판

명동역 입구 가로판대에 부착된 위안부 입체 포스터와 '기억의 터' 홍보판  ⓒ조시승

‘기억의 터’ 홍보는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는 홍보물이 멀리서도 인지될 뿐만 아니라 추모객들의 지속적 방문을 유도해 따뜻하고 소중한 공간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조명, 상징 조형물, 증강현실 등을 활용한 2단계 홍보기획을 준비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인간은 자유와 평화를 바라고 전쟁을 시기하지만 역설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려면 국력을 키워야 한다. 역사를 거울삼아 우리 민족의 아픔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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